[이달의 작가 | Artist of the month]
무심無心한 쓰기와 빚기의 즐거움
이수종
이수종의 작업에는 머리만이 아닌 매일 작업장에 나가 다양한 형태를 궁구하고 재료를 직접 이리저리 주물러 본 자가 터득한 실체적이고 물질적인 도道의 즐거움이 있다. 그가 작업하며 자신의 몸으로 깨달았던 것들. 재료, 형태, 장식을 이리저리 운용하며 단순하면 단순할수록, 비우면 비울수록, 마음을 내려놓으니 더 좋았고 즐거웠던 기억과 깨달음이 그의 몸 어딘가에서 종이로, 흙 안으로 옮겨 갔을 것이다. 글. 홍지수 미술학, 미술평론
이수종은 묵필로 A4 남짓 종이 앞뒤에 천자문을 반복해 썼다. 화면 위 글자들은 간격도 없이 서로의 몸을 겹치고 올라타며 한데 뒤엉켜 있다. 작가가 어떤 글자를 쓰고, 얼마나 반복해 썼는지 타자들은 도저히 파악하기 어렵다. 수많은 글자의 겹침과 먹물의 농담 속에서도 사이사이 살아남은 수평, 수직, 뻗침의 획을 보아 화면을 빼곡히 채운 것이 한자임을 확신할 수 있을 뿐이다. 이 화면의 가독이 어려운 것은 글자 쓰기의 순서와 방향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통상 서화는 화면의 앞에서만 이루어지지만, 작가의 필획 쓰기는 종이의 상단과 하단, 좌우, 앞면과 뒷면을 구분하지 않는다. 상단 왼쪽 끝을 시작점 삼아 하단 오른쪽 끝에 도달하는 균일하고 순차적인 쓰기가 아니기에, 작가를 포함한 그 누구도 쓰기의 순서와 양상을 예측하지 못한다. 글자를 무심히 반복해 쓰고 더 이상 쓸 자리가 없으면, 종이 뒤를 뒤집어 다시 쓰는 무심한 글쓰기다. 이처럼 이수종의 글쓰기는 글자 쓰기로 시작했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글씨를 잘 쓰겠다는 의지는 사라지고 붓과 의식이 흐르는 데로 움직이는 카오스적 양상을 띤다.
사진_김잔듸
필획 쓰기가 거듭될수록, 종이는 본디 색을 잃고 검고 얼룩덜룩한 ‘깜지’가 되어간다. 작가가 아무리 선과 질료를 겹쳐도 먹물은 종이를 꿀렁거리게 할지언정 두툼하고 무겁게 만들지는 못한다. 유화 물감이나 아크릴, 오일 파스텔, 흑연 등과 달리 종이 표면에 쌓이지 않고 섬유질 사이로 베어 들어가 물들이고 마르고 사라지는 먹물의 물성 탓이다. 또한 작가가 거듭 검은 필선을 그어도 종이는 완전한 검은색에 도달하지 못한다. 면面과 달리 선線은 쌓아도 궤적을 만들 뿐 균일한 두께와 층위를 만들지 못한다. 선의 궤적이 틈새를 덮고 지나갈수록 선은 다른 선의 영역을 또다시 건들고 지나갈 뿐 빈 공간만을 선택적으로 메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과 선이 덮지 못한 틈새 사이로 인쇄 활자, 사진의 일부가 보인다. 신문이다. 다른 드로잉을 공중에 들어 올려 빛에 비춰보니 화면에 붉은 혹은 검은색 숫자가 뒤집힌 채로 희미하게 보인다. 달력이다. 참으로 종이가 무심無心하다. 작가는 철 지나고 용도 상실한 묵은 종이를 모아 두었다가 원하는 크기로 접고 잘라 화면으로 삼았다. 무딘 칼로 거칠게 종이를 훅훅 잘랐는지 종이의 가장자리가 러플마냥 너풀거린다. 작가들은 대부분 자신이 공들여 만든 모든 것들이 자신보다 오래 살아남고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되길 소망한다. 그 열망에 의지해 매일 작업장에 나가 힘든 작업을 수행하고 때로 불현듯 찾아오는 나태나 자기 의심과 싸운다. 그리고 종당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 언제나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작업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 최고라 믿고 원하기에, 작가들은 언제나 최고의 재료와 도구를 선호하고 소유하길 갈망한다. 모든 예술가들의 자연스러운 생리이자 창작 욕망이다.
사진_편집부
그러나 이수종이 종이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저 드로잉에 적합한 재질, 적당한 크기, 형태다. 신문과 달력에 무엇이 인쇄되어 있었는지, 그 안에 있던 문자와 사진이 어떤 대소사大小事와 관계있던 것인지, 나아가 활자나 사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작가란 신문에 실린 어떤 큰 세상사보다 오늘 작업실에 들어가 자신이 해야 할 작업이 가장 시급하고 중한 사람이다. 세상의 일이란 대사大事가 생기면 거기서 소사小事가 생기고, 소사가 또 다른 대소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지금은 큰일이고 중한가 싶어도 시간이 흘러 다시 생각해보면 작은 일에 불과하고 의미 없는 하찮음에 불과하다. 어제도 하루가 있었고 오늘 하루가 있음을 사건들을 나열해 글과 사진으로 기록한 것이 신문이고, 다른 하루가 연이어 이어질 것임을 숫자로 표기한 것이 달력이다. 종이 위에 인쇄한 잉크의 49 흔적이 사건이고 사람이고, 세월이라 말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물결처럼 흘러가고 지나간 사건들의 축적을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 오늘 그리고 지금도 사라질 것이고.
그러나 세상사 공空, 소멸과 생성의 비분리성을 말하기 위해 작가는 기존의 것을 참혹하게 파괴하거나 지우지 않았다. 그의 글쓰기는 지움인 동시에 새로운 생성이다. 종이를 자르고 필획을 써서 신문, 달력, 화첩의 정체성을 무화시키고 형질을 바꿨다. 칼이 종이의 결을 횡단하여 면을 나누고 검은 획선이 표면에 쌓일 때마다 종이 위에 있던 것들은 분해되고 가려진다. 모르는 사람들과 사건들, 그리고 좋고 나쁨과 희로애락이 검은 장막 뒤로 사라진다. 그러나 그래도 살아남는 것들이 있다. 본 맥락과 서사에서 파편처럼 떨어져 나온 활자, 사진의 일부가 획과 획 틈새에서 올라와 유동한다. 먹선의 얇은 농담 층 뒤로 희미하게 보이는 사진, 이미지, 글자, 숫자들. 그것은 원본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들이 아니라 먹선과 다른 종류의 시각적 재미, 텍스춰이자 전체와 조화를 이루면서도 화면에 부정리듬을 만드는 조형 요소들이다. 이것이 결합된 팰림프세스트palimpsest의 화면 구조가 흥미롭다.
사진_김잔듸
이수종은 검은 바탕 위에 하얀 물감으로 안료를 바꿔 여러 형상을 그렸다. 그것과 전시장 내 흙작업과 견주어 보니 서로 닮은 듯도, 아닌 듯도 하다. 드로잉 중 밥그릇이나 손도구로 짐작되는 형상은 작가의 일상성이 엿보인다. 이를 두고 그의 드로잉을 흙작업을 위한 전 단계로 보거나 흙작업을 드로잉의 모델로 추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선후인지 혹은 인과 관계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실제 서로 연결되어 있고 어미-자식 관계인 것도 있으나 모든 개체는 개별적이고 독립적이다. 작가가 전적으로 순간순간 떠오르는 감각과 의지, 기억에 의지하여 생각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손 가는 대로 만들고 그린 것이다. 그리고 순서 없이 공간 속에 나열한 것이다. 이 전시에서 드로잉과 흙작업을 일대일 대응하여 찾아보고 순서를 추적하는 일이 관람의 재미일 뿐 필수적이지 않은 이유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022년 3월호를 참조바랍니다. 정기구독하시면 지난호 보기에서 PDF를 다운로드 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