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④
근대기 청자 재현의 열풍
글. 엄승희 한국 근대 도자사 전공, 미술사학자
청자상감동화포도문 술병과 잔, 한양고려소, 일제강점기, 13.5×2.7×3. 5,3.0×4.5×2.0cm, 고불미술관 소장, 사진제공_경기도자박물관
근세 이후 고려청자가 고려고분을 통해 본격적으로 세간에 알려진 시기는 19세기 말엽부터 대한제국시기를 거치는 때였다. 일본, 중국, 러시아 등과 통상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소위 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했던 제국 열강들의 관료들이 조선에 영입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국의 문화재들은 초유의 관심 대상으로 부각되었다. 특히 청일전쟁1894~1895을 기점으로 고려청자의 발굴과 도굴이 정점에 이르면서, 한국 도자기 수집의 주체는 일본인 관 료와 전문 골동상인들로 서서히 자리매김하였고 그 권한 역시 이들에게 주어졌다.1
일제강점기에 접어들어서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발족된 고적조사위원회와 이왕가를 전담 관리하던 이왕직李王 職에 의해 고려청자는 이전에 비해 보다 체계적으로 수 집되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청자의 재현문화가 생성되었다. 일제는 강점과 동시에 한국 도자문화에 대 한 관심을 표면적으로 드러냈다. 요업의 제작구조와 도자정책에 새로운 영역들이 구축되는 가운데 청자는 ‘재현’이라는 과정을 거쳐 근대 청자로 거듭났으며, 이 과정에서 양식의 전반적인 변화가 초래되었다. 그리고 관립 이왕직미술품제작소李王職美術品製作所의 재현품인 ‘비원자기祕苑磁器’를 비롯하여(사진 1), 당대 최고의 청 자공장이었던 삼화고려소三和高麗燒, 한양고려소漢陽 高麗燒, 계룡소요원鷄龍燒窯院 등에서 앞 다투어 명품 청자들을 제작하기 시작했다(사진 2,3).
-----이하 생략
_?xml_: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SPAN>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021년 9월호를 참조바랍니다. 정기구독하시면 지난호보기에서 PDF를 다운로드 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