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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월호 | 뉴스단신 ]

비평-흙은 무엇을 원하는가? -흙과의 상호작용
  • 편집부
  • 등록 2021-01-29 12:26:20
  • 수정 2021-01-29 12: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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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1편 | 흙과의 상호작용
흙은 무엇을 원하는가?
글. 조새미
미술비평, 미술학박사

 

2020 년 노벨 문학상은 미국 시인 루이즈 그릭(Louiseb. 1943)에게 돌아갔다. 그녀의 시 <야생붓꽃 TheWild Iris>에서 화자는 야생붓꽃의 구근이다. 야생붓꽃의 구근은 갈라진 흙과 흙 사이에서 햇빛을 본다. 어두운 땅속에서 구근은 의식을 가지고 살아있기에 흙은 잠들게 되는 장소이기보다는 아기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 깨고 나와야 할 껍질이자 빛을 향해 있는 문이다. 흙은 죽음과 삶을 동시에 인지하게 하는 경계이자 삶으로의 통로이다. 시인은 구근이 피어나는 순간이 우리가 “고통의 끝에 있는 문을 열고”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의 순간이라고 말한다. 인고의 시간 끝, 우리가 열게 되는 문이 바로 ‘흙’이다.
시인의 시 안에서 흙과 미술가, 조형예술가가 다루는 흙이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시와 미술은 상호 작용을 하며 발전해왔다. 예를 들어 로마 공화정 말기 시인이었던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 가 『시학Ars Poetica』에서 언급했던 “시는 그림과같이ut pictura poesis”라는 고전 경구를 생각해볼 수 있다. 시각 문화 연구자인 미첼W. J. T. Mitchell (b. 1942)은 “시를 그림과 비교하는 것은 은유를 만드는 것이고, 시를 그림과 구별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라고도 했다. 그림과 도예를 같은 범주 안에서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도예를 일상의 예술이라는 범주 안에 가두지만 않는다면, 시와 흙을 소재로 한 예술의 관계를 탐구하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다.
이를 위해 네 명의 작가의 작품에 관해 논의해보고자 한다. 작가가 가지는 자유라는 특권은 흙이라는 매체와의 관계에 있어 어떻게 조정될 수 있을까? 인간은 조형예술의 재료인 흙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특권의 수혜자일 뿐인가? 우리는 흙의 속삭임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흙은 무엇을 원하는가? 흙과의 교감 없이 작품을 세상에 내어놓을 수 있는 도예가가 있으랴만 이 글에서는 도예가의 작품에 한정하지 않고, 일련의 물질적 실천으로서, 흙에 관해 철학적으로 탐구하며 흙과의 대화를 시 도하는 작가와 작품에 주목했다.


흙의 속삭임을 듣는다
곽인식
흙의 속삭임을 듣는다는 곽인식 (1919~1988)에게 소성의 과정은 생략되어 있다. 곽인식은 일상 사물, 돌멩이, 유리, 점토와 같은 것들을 사용해 전위적으로 작업했던 재일교포 작가였다. 1919년 대구에서 태어나 1937년 도일하여 일본에 유입된 서양의 아방가르드 예술을 접했고, 1945년 광복 후에도 도쿄를 중심으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했다. 곽인식은 일본의 현대미술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모노하もの派의 선구자로 평가되어 왔다. 사물 그 자체, 공간, 시간, 행위, 사물의 배열에 주목했던 작가는 1960년대 초부터 이와 관련한 작업을 시작했으며1970년대에 모노하의 영향력이 확장되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나갔다. 곽인식의 작품이 모노하 작가들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고 평가할 수 있는 지점은 사물로부터 기인한 ‘현실’을 작 업으로 어떻게 드러낼 수 있는지 고민했다는 점이다. ‘물질’을 탐구하는 작업에 몰입했던 것도, 화면 위에 철사, 너트, 바둑돌, 거울, 전구, 깨진 유리와 같은 일상의 소재 를 부착했던 것도 사물 그 자체 안에서 현실 속의 질서를 되찾고자 하는 의도와 관계가 있다. 예를 들어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작품 63>은 깨뜨린 유리 조각의 파편을 제 자리를 찾아 캔버스에 다시 옮겨 붙인 결과이다. 미술사가 박순홍은 유리라는 소재를 곽인식이 작업에 끌어들인 이유를 “한번 깨지고 나면 원상태로 복구할 수 없는 유리를 어떻게든 다시 ‘하나’로 만들고자 한 시도”로 보았으며 이를 1960년 일본에서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 었던 북송사업과 대한민국의 4.19 혁명과 같은 조국의 현실에 개입하지 못하고 부채의식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던 그의 자화상으로 해석했다.
세간에 많이 알려진 밝은 색점에 의한 대형 회화와 함께 곽 인식의 점토 작업은 후기 작업에 해당한다(1976~1988) . 이 시기 곽인식은 돌, 종이, 점토, 나무 등 특정 매체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작업했는데 그는 흙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는, 흙이라는 물질 자체와 조응하고, 기다리는 인내심을 발휘했다.

“우주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물질이 존재하고 있 다. 그 많은 물질마다 말을 하게 해서 무수한 말을 들을 수 있게 된다면 (...) 물질이 뱉는 말은, 반드시 새로운 차 원을 낳게 될 것이다. (...) 나는 일체의 표현 행위를 멈추 고 사물이 하는 말을 들으려 하는 것이다.”
_곽인식, 「미술수첩美術手帖」, 1969

1978년 개인전에서 점토 작업이 발표되었을 때 흙이 무슨 말을 속삭일 수 있겠느냐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다고 혹평을 가했던 비평가나 관람객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비난이 곽인식의 작업의 깊이를 더함에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곽인식의 작업에는 작업 과정의 증거가 각인되어 있는데 활동의 증인이 작품이 되는 이 러한 특성은 점토 작업에서 특히 더 두드러졌다. 또한 점 토의 가소성은 작가와 재료 사이 의사소통의 통로가 되 었다. 곽인식의 점토는 “늘이고, 펼치고, 둥글게 만들고, 끊고, 접고, 좁히고, 덧붙이고, 중복시키고, 일탈시키고, 환원시키는 등등의 타동적 역학 작용을 작가로부터 받아곽인식의 흙에 드러나는 표식으로서의 증거는 오직 특별 한 재현적 의미를 획득하지 않을 때에만 의미를 획득했 다. 과묵함, 그리고 때때로 침묵이 남았다. ‘침묵’

침묵의 의미는 무엇일까? 침묵에 소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관객이 점토로부터 침묵의 소리를 듣기를 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침묵의 소리를 듣는 방법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곽인식의 행위는 철저히 중립적이었다. 작가는 자신의 행위와 점토 사이에 능동과 피동에 관한 철저한 중립만이 요구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곽인식이 점토에 가한 행위는 일정한 “타동적 역학 작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만약 그의 행위가 중립적이지 않았다면 점토는 작가의 의도를 피동적으로 수용하는 매체가 되었을 것이다. 작가는 여러 가지 우연에 의해 점토가 변형되어 예기치 못한 결과로 이행되지 않도록 상호작용을 인지할 수 있는 순간, 점토가 객체도 주체도 아 닌 상태가 된 바로 그 순간에 활동을 멈췄다.
흙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우리는 흙의 언어를, 점토는 인간의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다. 예술가에게 포착되고 적응된 대상으로서의 흙이 아니라 흙이라는 물질 자체가 대상으로 전환되는 그 순간 이 서로의 언어를 깨우치게 되는 순간이 아닐는지. 20세 기 후반 곽인식이 실험했던 흙덩이들이 감각적 형태, 언 어적 해석을 배제한 채 사물과의 상호작용이라는 철학적 질문의 한 가운데 놓여있다.


날 것 그대로의 점토
피비 커밍스
원초적인 날 것 그대로의 점토를 사용해 조형적인 아름 다움을 구축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 면 점토 그 자체는 미적 대상일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작가가 더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는 조건이 될 수도 있다. 주 로 소성하지 않은 흙을 사용하여 작업하는 피비 커밍스 Phoebe Cummings b. 1981 는 2011년 영국 도자 비엔날레 British Ceramics Biennial Award 수상자였으며, 2017 년에는 영국 BBC 라디오의 인기 프로그램 ‘여성의 시간 Woman’s Hour’ 70주년 기념행사였던 ‘여성의 시간 공예상Woman’s Hour Craft Prize’ 초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커밍스의 작품에는 세기말적 아름다움이 녹아 있다. 주로 공상 과학 소설에서 작품의 모티프를 찾는다는 커밍스는 연약하기 그지없는 대상을 두려움 없이 세상으로 내보낸다. 점토로 만든 설치물은 손끝만 닿아도 형태가 변형될 것 같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을 원하는 것은 인간의 오래된 열망이다. 서양 미술에서 유화 물감 이 발명되면서 그림의 내구성 문제를 해결했듯 예술품도 예외가 아니다. 유약을 발라 고온에서 소성 과정을 거친 도자기도 충격으로 파손되지 않는다면 수천 년의 세월을 거뜬히 견딜 수 있다. 하지만 예술품의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을 모른 척 하는 것인지 커밍스의 작업은 철저하게 일시적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커밍스의 작업은 서서히 붕괴하고, 그 과정 또한 작업의 일부가 된다. 이벤트가 종료된 후 사진, 동영상, 그리고 기억으로 존재하는 커밍스의 작업은 그런 의미에서 ‘조형물’과 같은 물적 대상이기보다 춤이나 연극 같은 퍼포먼스로 이해될 수 있다.


커밍스가 작업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던 계기는 2010 년 런던에 위치한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뮤지엄Victoria & Albert Museum, V&A에서의 연구 기간이었다. 커밍스는 V&A에 소장된 동서양, 고대, 현대를 아우르는 방대 한 세라믹 소장품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특히 작가는 19세기 산업적으로 생산된 식기에 전사된 풍경 이미지에 주목했고 상품을 통해 자연 풍경이 소비되는 방식을 탐구했다. 그런 면에서 커밍스가 흙을 대하는 태도는 18세기 영국 풍경화가의 태도와 상반된다. 18세기 정원 조경과 풍경화는 모두 이상적 경관을 구현하기 위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특히 정원 조경은 17세기 이탈리아의 이상주의 풍경화를 원형으로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자연 요소들을 재조합함으로써 발전했다. 이러한 가상적 이상 세계로서의 ‘영국식 풍경English Landscape’은 낭만주의 시인, 18~19세기의 영국 풍경화가, 그리고 산업적으로 생산되는 도자기 장식 디자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커밍스는 그림 같은 이상향理想鄕에 관한 인간의 멈추지 않는 욕망을 일시적으로만 존재하는 자신의 점토 작업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영국 공예청의 로지 그린리스 Rosy Greenlees는 커밍스의 ‘여성의 시간 공예상’ 수상을 축하하며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피비의 작품은 (...) 시간의 흐름을 애도하기보다는 축하하라고 요청한다. 그녀는 소유하기 거의 불가능한 작업으로 공예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에 도전하지만, 물리적인 제작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끼며 동시에 고도로 숙련된 재료에 관한 이해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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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021년 1월호를 참조바랍니다. 정기구독하시면 지난호보기에서 PDF를 다운로드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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