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공예의 길
-벽癖 있는 사람들, 멋 있는 사람들
글. 김동현 테일러, 프리랜서 에디터
매일 아침 양복점으로 출근하는 나는 재단대와 재봉틀 앞에서 작업한다. 재단대 위에서는 옷감을 자르고 재봉틀에서는 자른 옷감을 바느질 한다. 마름질한 원단을 자르는 순서에도 일정한 규칙이 있고 자른 원단을 봉제하기 전 상태로 갈무리 하는 방법에도 일정한 양식이 있다. 나는 그것을 20대 초반 영국에 와서 영국인들에게 배운 대로 실천 중이다. 아주 미미한 부분 작업방식을 개선시킨 것 말고는 나와 비슷한 역할의 테일러들도 영국식 옷짓기라는 대동소이한 틀 안에서 모두 작업할 것이다. 일의 순서와 방법을 정해놓은 그 규칙들은 어디에서 왔는 . 내게 기술을 알려준 스승이 그렇게 했듯, 또 스승을 가르친 스승이 그랬듯이 옷의 원형이 생긴 이래 그 완전성의 모형은 개인들의 노력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대부분의 도제들이 그러하듯 스승으로부터 배운 기본적인 방식을 습득하면 초기에는 강박적으로 치수에 대해 집착하거나 꼼꼼한 작업물을 만들기 위해 여러 종류의 도구를 구비해놓고 멋진 솜씨를 자랑하는 결과물을 내보이곤 한다.
연차가 오래될수록 도구에 의존하지 않고 제 손과 눈이 하나의 도구가 되어 자연스러운 선과 형태를 만드는 선배 장인들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역설적인 것은 그렇게 공들여 만든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옷들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경우가 많다.(옷이 살아있다 는 해석은 여러가지 의견이 있겠으나 개인적으로는 인체 를 반영한 듯 자연스러운 선과 충실한 형태감을 본다.) 공예의 길에 신체가 기억하기 위한 매일의 수행이 동반되어야 하지만 그런 강박과도 같은 난행難行의 길만이 보통 사람을 예인이나 대가로 이끄는 것일까 의문이 든다. 공예인에게 있어 매일의 수행은 작업의 완성도를 완벽으로 수렴시킨다. 훌륭한 공예가가 되기 위해 끊임없는 연습과 연마는 필수적이다. 신체를 기술에 적합하게 단련시키는 것이고 달리 말하면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버릇이라고 말한다. 고집스러운 버릇을 가지고 있는 공예인들은 많다. 벽을 하나씩 갖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어릴 때부터 해온 하나의 시스템을 만들어 그 양식 안에서 기복없는 안정적인 작품을 생산한다. 하 루를 보내는데 그 하루는 어제와 다르지 않고 내일은 오늘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수행자 본인의 외부적 환경이나 내적 상황에 큰 방해 요소가 없는 한 그는 1년이든 10년이든 처음 배웠던 방식으로 차근차근 작업의 완성도를 올릴 것이다. 이것은 모방이라는 수행의 맹점이 된다. 어제와 오늘의 활동이 다르지 않은 시간적 모방이요, 같은 곳에서 선임자가 했던 방식을 이어가는 공간적인 모방이다. 숙련도는 완벽을 향해 달려가지만 동시에 창작활동의 경계는 조금씩 좁아지는 역설이다.
수행 중의 창작활동에 있어서 벽이라고 하면 그것은 모사에 가까운 것이다. 자신보다 뛰어난 대가의 작품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복제하는 노력이라든가 어떠한 사 물을 치밀하게 관찰해서 본 따는 활동은 벽의 성질에 가깝다. 모사만을 잘하는 것은 예인이 아니라 기술공의 능력이다. 그것은 우수한 기계적 가치다. 우리는 기계를 가치존재로 보지는 않는다. 작품을 보며 작가의 버릇이 느껴질 때 우리는 작가가 얼마나 치밀하고 철두철미한 계획을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었는지 상상한다. 그것은 때때로 작품을 감상하는데 좋은 효과를 준다. 그러나 작가 에게 있어 작품의 버릇이 일관적으로 보인다는 것은 아직 완숙되지 못한 특징이며 타인의 영감 위에 부유하는 안타까운 개성을 보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벽에 집착하는 것은 더 넓은 작품세계로 가는 길목 위의 장애물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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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020년 12월호를 참조바랍니다. 정기구독하시면 지난호보기에서 PDF를 다운로드 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