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일본에서 만나는 조선백자
아라시야마의 갤러리 이조李朝
글·사진. 류제윤 일본 통신원
교토에서 가장 유명한 명소를 꼽는다면 교토 서쪽, 사가노의 아라시야마風山일 것이다. 영화 <게이샤의 추억> 에 등장하는 대나무 숲으로 유명해진데다가 오래된 저택들이 즐비해 고즈넉한 거리와 유명한 절과 신사들이 밀집해있어 아라시야마는 교토를 방문하는 여행자에겐 빼놓을 수 없는 관광포인트다. 하지만 화려한 관광지의 일면에 예부터 교토의 귀족들이 살던 아라시야마에 아직도 그 잔잔한 풍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존재한다. 일본의 대표적 전통 건축양식 중 하나인 스키야식 저택에 자리한 ‘갤러리 이조李朝’가 바로 그 예이다. 관광루트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 위치해 언뜻 지나치기 쉽지만, 일단 발을 들이면 정밀하게 가꾸어진 일본식 정원의 곳곳에 한국인에게 익숙한 조선시대의 고미술품들이 방문한 이를 반긴다.
조선시대의 석조물, 석등 등이 일본 전통 정원에 자리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정원과의 조화로움에 아름다움을 느끼면서도 신기함으로 다가온다. 정원을 지나 두 채로 이루어진 건물을 둘러보면 장식장, 족자 등 몇 백년은 족히 된 한국의 고미술품과 조선백자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가장 일본스러운 마을에 지어진 일본스러운 저택, 그 안에는 어째서인지 한국이 가득하다. 갤러리의 주인, 오오모리 케이고大森 敬吾를 만나보았다.
갤러리 이조는 본래 주거용 저택으로, 이곳 사가노 출신 인 오오모리씨가 노년을 보내기 위해 마련한 곳이다. 평소 깊게 교류하고 있던 교토를 대표하는 도예가문 ‘라쿠 키치자에몬’의 요청으로 오오모리가 이탈리아 유학시절 알게된 ‘알랭 나움’이 프랑스 총영사로 부임하며 그에게 임대해주게 되었다. 10여 년 전 알랭 나움씨가 정년퇴직으로 프랑스에 돌아가고 난 뒤, 갤러리로 운영할 수 있도 록 조금씩 공간을 단장했다. 라쿠키치자에몬 15대의 작품 10여점과 오너인 오오모리가 소유하고 있던 조선 백자로 첫 전시를 선보이며 문을 열었다. 오오모리는 재일 교포인 자신과 라쿠키치자에몬인 쵸지로가 조선에서 터 건너온 도래인 (한반도 혹은 중국대륙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사람)의 후손임을 알리며 한국과 일본의 도예 교류에 상통하는 의미 가 있어 전시를 열게됐다고 전했다.
조선 백자를 중심으로 꾸준히 컬렉션을 확장시켜온 갤러리 이조는 어째서 조선 백자를 소장하게 되었을까. 그 뿌리는 오오모리가 한국에서 건너온 재일교포라는데 있다. 오오모리의 부모님은 나이 16, 17세 정도에 부모를 잃고 일본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 둘은 돌아갈 곳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완전히 일본에 녹아 들기 위해 한국인이 밀집 지역을 선택하지 않고, 이곳 사가노의 아라시야마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오오모리의 부모는 자신들을 버린 한국의 부모에게 매번 돈을 송금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재일교포의 마음속엔 고국인 한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올해로 73세인 오오모리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아직도 고민하고 있다고 말한다.
오오모리는 일본에 살지만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정체성을 고민하는 나날들 속에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이곳 사가노에 자신의 원점이 있다고 느꼈다. 많은 곳을 돌고 돌아 지금의 갤러리 이조의 자리에 정착했다. 자신을 반 半 일본인이라고 칭하는 오오모리는 자신의 한국적 정체 성의 존재가치를 남기기 위해 조선백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이 모으고 있는 이 조선백자 컬렉션은 결국 ‘물건’인데, 이 물건들은 살아있는 동안 보관하는 것이지 죽어서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자신의 소유라기보다는 자신이 죽어서도 이곳에 남겨둘 유산으로 써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자신의 정체성이나 사명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오오모리는 조선백자를 어떻게 수집하게 됐을 까. 본래 미술을 공부하고, 이탈리아 유학까지 갔다 온 그는 미술에 대한 관심이 높았기에 종종 미술품을 구매 하거나 수집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던 중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해 조선백자 하나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어, 고미술상에게서 내력 있는 조선백자를 고액에 구입하게 된다. 하지만 다른 고미술상에게 물어보았더니 그와 비슷한 것이 4년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4분의 1 가격에 낙찰되었다고 듣게 된 오오모리는 이 경험을 통해 조선백자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매년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에 참가하고, 주변의 지인과 관계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조금씩 조선백자에 대해 알게 된 그는 많은 실패를 거듭하며 조선백자의 매력을 알아보기까지 10년 정도 걸렸다고 한다.
오오모리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 백자의 흰색에는 시기마다 많은 변화가 있어서 517년에 걸친 조선왕조 중 18 세기경 금사리 가마의 백색이 가장 아름다운 색으로 알려져 있다고 말한다. 그 시기 백색의 완성도가 높을 수 있었던 이유는 중국이나 일본에 공격 당하지 않은 시대 배경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또한 바로 앞 세기의 주요 가마인 도마리 가마경기 광주의 백자가 회색 빛이 도는 백색인 것에 비해 금사리 가마경기 광주는 차분한 유백색을 띄고 있고, 금사리 가마의 유백색도 시대에 따라 색감과 광택 등이 미묘하게 변하는 특징에 매료 돼 금사리 가마의 백자를 수집하게 됐다고 한다. 수집한 유백자에서도 그 시절 담았던 김치나, 술 등 생활에 의해 물든 얼룩에 의한 자연스런 변색이 아름다워 보이던 순간이 있었고, 그 순간 백자의 얼룩에서 드러난 ‘표정’ 을 보며 “아, 이런 아름다움도 있구나!”하며 더욱 조선 백자 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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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020년 12월호를 참조바랍니다. 정기구독하시면 지난호보기에서 PDF를 다운로드 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