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OF THE MONTH
물질의 면모를 채집하고 관계를 조율하는 한 개인의 세련된 감각
원경환 -잡기雜記, Different Records
글. 홍지수 미술평론, 미술학박사 사진. 편집부
작가는 물질을 주무르고 매만지면서 모종의 경지에 다가가는 것을 자신의 일이자 즐거 움으로 간주하는 자다. 작가는 물질을 빌려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형상, 자신이 타인에게 보여주려 하는 바를 이 세상 어느 누구라도 볼 수 있는 상태로 드러낸다. 그러기 위해서 작가는 이 지구상 물질들 중에 자신의 성정과 취향 그리고 하고자 하는 바에 가장 합당한 물질을 골라야 한다. 나아가 그것을 다루기 위한 기술과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모든 작가들이 묵직하고 비린내 나는 땀의 노동으로 재료를 다듬고 자신이 상상한 혹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형상으로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원경환은 재료에 형태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는 물질을 깎고 덧붙여 자신이 원하는 형태를 도출하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형태, 질감, 색을 지닌 물질 혹은 사물을 주변에서 찾는다. 시간을 두고 수집한 재료와 오브제들을 조합한 후 최소한의 제작과 가공을 거쳐 만든 결과물을 만든다. 그것이 작가의 판단 혹은 장소에 따라 오브제가 되고 설치가 된다. 재료는 새 것보다 목금토木金土의 성질을 지닌 자연재, 발견된 오브제 중에서 주 로 자연스러운 물성과 세월감이 강조된 것들을 애호한다. 그는 물질이 불, 물, 공기 등과 만났을 때 혹은 성질이 다른 물질과 물질이 만났을 때 발생하는 다양한 사건의 양상을 ‘물질의 인상印象’으로 지칭한다. 그리고 그것들의 만남을 오행상생상극五行相生相 克의 관계로 이해한 후, 명징하고 간결한 이미지로 보여 주었다. 이 모든 작업은 작가가 자신의 의지나 개념을 우선하는 행위가 아니라 물질 혹은 발견된 오브제가 지금의 흔 적을 가지기까지 거쳐 온 시간과 과정을 최대한 존중하려는 것이고 사물의 피부에 스며들어있는 독자적인 표정과 지문을 탐닉하고 드러내고자 함이었다.
원경환의 작업은 첫째, 인위적 변형보다는 재료가 지닌 자연스러운 물성과 마티에르를 중요시하고 둘째, 미니멀한 형태를 띠며 셋째, 동어반복의 설치 형식이 주를 이뤄왔다. 이를 통해 군더더기 없는 최소한의 요약과 묵직하 고 강건한 힘을 추구한다. 이러한 면모 때문에 그의 작업은 산업재나 자연재료를 이용하여 하나의 사물이 다른 사물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를 보아 사물을 재구성하고 그것의 존재방식을 설명하고자 한 ‘모노하’ 혹은 예술 외적 요소를 표현하거나 상정하지 않고 작품의 가장 순수하고 본질적인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미니멀리즘’과의 연관성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말했듯, 어떤 미술 사조나 서사를 앞세워 물질에 형상과 개념을 작품에 주지시킨 바 없다.
그가 미술에 대한 혁신이나 탈공예의 개념을 꿈꾸지 않았더라도, 재료와 수공에 대한 의미와 비중이 남다른 공 예계의 분위기와 인식 속에서 재료를 깎아 내거나 살을 붙이는 전통 방식 대신 ‘오브제 사용’을 재현의 방식으로 선택해 작업해왔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그는 삶의 이곳저곳에서 마주치고 여기저기 흩어진 것들 중에 자신의 성정, 취향, 감각에 맞는 것들에게 눈길을 주고 인연이 닿은 것들을 선별해 조형의 재료로 삼는다. 여기서 대상이 자연재인지 공산품인지, 누가 만들었거나 소유했었는지, 기능성의 유무 그리고 재료의 이디엄이 무엇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저 작가 자신이 느끼는 형태와 질감, 색, 다른 것과의 조합 가능성 등에 대한 작가의 극히 주관적 ‘재미’ 내지 ‘흥미’가 선택의 기준이고 작업의 동기다. 그것들을 시시때때로 이리저리 조합하며 흥미로운 형상, 상태, 관계가 될 때까지 시도를 거듭하는 것이 그의 작업 방식이다. 즉, 주변에 대한 성찰과 유의 깊은 관심과 호기심, 감각이 곧 작업의 내용이자 아이디어, 자신만의 색깔이 되었다고 본다.
재료와 재료, 혹은 발견된 사물간의 조합은 태생과 재질, 세월 묵음 다른 것들의 결합이기에 어울림이나 완성도가 매번 작가가 원하는 바와 부합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튀는 것,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지우고 감추고 덜어내는 일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인위人爲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다. 첫째는 재료가 본디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 움을 해치지 않아야 하고, 두 번째는 작가의 감각과 사유 와 부합하는 색, 질감, 형태의 범주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간 모노톤의 깊은 색채, 반/무광의 고급스러 운 광택, 단순한 기호학적 형태, 세련된 절제미 그리고 구체적 형태보다 물질 자체, 인위보다는 자연스러운 세월 묵음을 중시하고 추구하는 ‘스타일’로 나타났다. 나는 그것이 원경환의 작업을 힘 있고 돋보이게 한다고 생각한다.
-잡기雜記, Different Records-. 이번 전시는 흙을 주 재료 혹은 구심점으로 사용했던 전작을 벗어나 좀 더 다 양한 재료, 오브제를 수용하려는 작가의 새로운 조형 의 지, 실험정신을 읽을 수 있다. 2013년 동일제목의 전시 <잡기雜記>보다 발견된 오브제 즉, 도자보다 타재료 사용의 비중이 증가했다. 덕분에 한 물질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물질이 품고 있는 고유 의 인상印象’ 그리고 물질과 물질 사이의 관계성을 포착 하고 결합하고 조율하는 작가의 즉흥성과 아이디어, 연출력이 한층 집중되고 부각되는 느낌이다.
이번 전시에는 나무 판넬을 이용한 매체 확장성이 유독 돋보인다. 작가는 세월 오래 묵은 판재의 거친 표면을 둥근 단면의 드릴 칼을 사용해 표면 음각의 패턴을 만들었다. 수직으로 내린 빗방울들이 수면 위에 둥근 파동을 연 이어 만들 듯, 나무의 표면에도 파동과 리듬감이 인다. 작가는 수면을 비집고 핀 연꽃마냥 원의 중심마다 작고 붉은 플라스틱 꽃을 피웠다. 다소 키치한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그간 작가가 만들어온 묵직한 스타일과 무게를 스스로 탈피해보려는 유쾌한 시도다. 나무 위에 옻칠 같은 전통도료 대신 유성도료/아크릴 물감, 수성안료 등을 덧발라 추상 회화를 시도한 것 역시 오브제아트가 간혹 처할 가벼운 시각적 유희에 함몰되지 않고 한정된 재료, 매체에도 구속되지 않으려는 작가의 새로운 의지로 보인다. 두툼한 부피가, 질감이 있는 입체의 표면에 회화처럼 색을 칠해 면을 분할하고 선을 긋고 오브제를 덧붙이는 모든 행위는 캔버스의 평면 혹은 조각의 부조와 다른 새 로운 차원의 화면 구성을 얻기 위함이다. 그러나 원경환 목재 작업은 그것이 너른 평면이기 이전에 고유의 부피를 지닌 입체물이자 물질 덩어리라는 점을 확인시켜준 다. 작가는 톱으로 단면을 가르고 일부를 거칠게 뜯어내 매끈한 아크릴 물감 층 밑에 숨겨져 있던 거친 결을 드러 내기도 하며 톱질을 가할 수 있는 것은 흙이나 금속과 달리 나무가 무르기 때문이고 결이 있기 때문이다. 이 밖에 금속이나 도자기 같은 다른 물성을 결합하는 것 역시 목재 고유의 물성과 표정을 궁구하고 드러내기 위한 일련의 시도들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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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020년 11월호를 참조바랍니다. 정기구독하시면 지난호보기에서 PDF를 다운로드 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