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도자와 양복, 새로운 탐색
글. 김동현 테일러, 프리랜서 에디터
인간의 생산 활동은 소유 욕망이며 그것은 모든 것을 담는 데서 시작했다. 담음이 차면 비우는 일련의 동작들이 문명을 이끈 정신적인 중추였으며 지금까지 이어온 예술과 창작활동의 본질이라 믿는다. 나는 양복을 만들고 있는 한 사람으로써 양복 또한 우리의 인체를 감싸고 담는 용기라는 생각 아래에 도자와 양복의 상관관계를 명확히 밝히고 그것의 미감을 설명해야하는, 어줍지 않은 사명감을 갖고 있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보통 양복을 만드는 테일러와 도자를 빚는 도예가의 태도를 ‘크래프트맨쉽-장인 정신’이라는 형식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59년 최경자 디자이너의 ‘청자’ 드레스, 지안 프랑코 페레가 디자인한 항공사 유니폼의 의 비색, 70년대 한국맞춤양복협회가 주창한 한국인의 패턴인 ‘청자선’ 등. 의복계의 도자에 대한 천착은 단지 우연이라고만 보기 어렵다.
도자와 양복이 지니는 상관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그 오브제가 가진 공통의 성질을 먼저 규정해야겠다. 두 가지 모두 인체나 음료, 음식 등을 담는데 존재 의미가 있으며 그것을 실용에 중점을 두어 담을 것이냐 장식에 두어 담 을 것이냐 하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실용과 장식으로 파 생된 조선인과 고려인의 생활관 그리고 지금 주류 양복의 큰 명맥인 영국과 이탈리아의 양복의 미감을 풀어내는데 우리 도자는 큰 단서가 될 듯하다.
고려 청자의 비색· 祕 色이라는 오묘한 푸른색과 형태에서 이 단초를 진솔하게 드러낸다. 신라와 백제 시대에 융 성한 불교는 고려조를 통해 극렬하게 신봉되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적멸위락 그리고 선종의 깨달음은 백성들로 하여금 세계를 덧없는 것으로 느끼고 생존을 무無로 인식시킨다. 현세를 믿지 않고 내세에 가길 꿈꾸며 극락 정 토에 왕생만을 빌던 고려인의 미감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그들에게 현세가 없기 때문에 향락을 마음껏 해도 되 고 귀족이 사치스럽고 공예가 화려하게 발전해왔다. 청자는 ‘없음’이 극도로 정제되어 기물로 나타난 표상이며 이 허무가, 이 어둠이 불의 열정으로 승화된 흑黑/흙 土이다. 미술사학자 우현 고유섭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 면 청靑은 어둠과 검정이 실로 똑똑해진 흑黑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청자의 미감은 이탈리아의 양복과 이어진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복식의 형태와 실루엣은 양감보다 흐름과 리듬에 치우쳐 있다. 이탈리아 양복은 전체적인 리듬과 인체를 감싸는 흐름으로 보아야지 양감을 채워 넣어 또 다른 토르소를 성형하는 영국식 양복의 시선으로 보면 안 된다. 그들의 주머니나 소매봉제 디테일에 대한 집착.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수공을 넣어 매달리는 것은 청자에 구름과 학, 오동과 봉황, 파도와 용을 상감하는 작업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옷감에 다트를 잡지 않고 양감이 아닌 리듬을 생성하는 것은 옷감이란 평면을 어루만져 리듬을 만드는 무無의 활동이라고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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