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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월호 | 해외 ]

핀란드 피스카르스<꿈 KWUM>
  • 편집부
  • 등록 2020-06-01 17:09:00
  • 수정 2020-06-08 10:3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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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핀란드 피스카르스의 공예 교육에 대한 꿈을 담은 도자 미술관
꿈 KWUM
글·사진.서명지 핀란드 통신원


피스카르스 비엔날레가 열렸던 지난 6월, 이곳에 도예미술관 오프닝 행사가 열렸다. 핀란드의 작은 예술가 마을에 위치한 도예 박물관 이름은 ‘꿈 KWUM ’이다. 미술관 이름은 한국어로 꿈 dream 을 뜻하며, 이곳 피스 카르스에서는 카린 비드나스의 뮤지엄을 말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한국어 이름을 가진 도예 미술관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꿈 박물관을 방문해 설립자 카린과 박물관이 생겨난 계기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미술관의 한국 이름
한국을 10 번 이상 방문했다는 관장 카린은 리움 미술관을 방문했을 당시, 마침 새로 오픈할 도예 박물관 이름을 고민하던 중이었다. 카린은 리움 미술관의 아름다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설립자의 성씨인 ‘리 Lee ’와 미술관을 뜻하는 영어의 어미 ‘움 - um ’을 합 성하여 만들어진 리움 Leeum . 그 이름에서 영감을 받았고, 카린 Karin Widnäs 의 이니셜을 따 KW 그리고 어미 - um 을 합하여 ‘ KWUM ’이라 이름 짓게 되었다. 이 단어를 핀란드식 으로 읽으면 ‘꿈’이라고 발음하게 된다. 후에 한국 지인들에게 꿈 단어의 뜻을 듣고 정 말 멋진 우연이라고 생각했고, 꼭 맞는 이름이라 결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개인 미술관의 설립 배경
도예가인 본인이 정부의 지원이 아닌 개인의 힘으로, 기업들의 후원을 직접 받아 도예미술관을 설립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한국을 자주 방문했던 그녀는 한반도 천 오십년 자기의 역사와 그 수준에 많은 영감을 받았다. 피스카르스에 있는 모든 아티스트와 공예 스튜디오들 또한 힘의 원천이 되었다. 그녀가 그동안 수집했던 도예 소장품을 대중에게 선보임으로써 공예의 중요성과 흙이라는 재료로 어떤 것들이 가능 한지 선보이고자 했고, 그녀의 스승이자 핀란드 도예의 선구자였던 뀰리끼 살멘하아 라 Kyllikki Salmenhaara 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도 근원에 있었다. 나아가, 대학의 도자 예술 교육이 점점 줄고있는 현대 공예 교육을 일깨우기 위함이기도 하다. 카린은 전통 공예 교육 -특히 도자분야-가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해 많은 걱정을 하고 있고, 박물관을 설립 후 정책 담당자들을 초대한 상태이다.

핀란드 도자 교육의 역사
미술관은 도예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1 층 공간 한 벽면에 가득 핀란드 도예교육의 역사를 설명했다. 역사적으로 도자역사가 긴 한국과는 달리, 핀란드는 도자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다. 본지 2018 년 11 월호 에서 다룬 적이 있는 핀란드 회사 ‘아라비아’주방 자기 회사가 1873 년에 설립되었고, 아라비아의 첫번째 도예 디자이너 투레 우베리 ThureÖberg가 탄생했다. 물론, 이 땅에서 그릇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때는 기원전 5300 년 경 빙하기 직후 경이라 할 수 있지만, 점토보다는 나무를 더 많이 사용했다.

지금은 알토대학교 예술대학이라고 불리지만, 2010 년 이전에는 헬싱키 예술대학이었던 최초의 공예 학교는 1871 년에 공예 교육을 위해 설립되었다. 사실 1920 년 알프레드 윌리암 핀치 Alfred William Finch 가 교단을 맡기까지는 도예가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은 전무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 후 약 80 년 동안의 핀란드 도자 교육을 이끈 교수를 손꼽는다면 세 사람을 명시할 수 있다. 알프레드 윌리암 핀치, 엘사 엘레니우스 Elsa Elenius , 뀰 리끼 살 멘하아라 세 명의 도예가들은 현재 핀란드 도자교육을 토대를 다졌다. 알프레드가 약 30 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고, 그가 별세한 후 제자인 엘사가 약 30 여년을 도예교육을 맡았다. 그녀에게 지병이 생기자 엘사의 제자이자 카린의 스승인 뀰리끼가 교단을 이어 받았다. 현대의 도자 교육은 그녀의 제자들이 이어가고 있다. 뀰 리끼는 전통 도예 기법뿐만 아니라 도예가로서의 디자인하는 스킬을 가르쳤고, 1970 년대부터 도예가들이 개인 스튜디오를 설립해 독자적인 작품활동을 많이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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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019년 8월호를 참조바랍니다. 정기구독하시면 지난호보기에서 PDF를 다운로드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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