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해주도자에 대하여
Part Ⅲ.< 최봉영 컬렉터의 수집 하우스>
진행·정리_이연주 기자 사진_ 편집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는 해주도자 수집가가 마침내 문을 열었다. 차곡차곡 모아온 방대한 콜렉션을 위해 80여평대의 수집고이자 거주 공간을 새롭게 마련한 뒤였다. 그야말로 진귀한 콜렉션을 한눈에 볼 수 있었던 날, 다채로운 해주도자가 집약된 일련의 전시를 보는 실감을 하게 된다. 탄탄히 다진 안목과 취향으로 해주도자의 맥락을 만든 그를 만나 수집에 대해 물었다.
Q.도자 수집의 어떤 점에 매료되었나.
A. 1980년에 한국학대학원에 진학해 학문의 길로 들어서면서, 옛사람들이 만들고 썼던 물건들을 수집하는 일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내게는 한국문화를 연구하는 일과 한국사람이 만들고 사용했던 물건을 수집하는 일이 하나를 이루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서적이나 간찰을 수집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다가, 토기나 도자기 등으로 관심의 폭을 넓혀 나갔다. 그러다가 20세기에 만든 갖가지 공예품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일에 집중하게 되었다.
Q. 왜 20세기 공예품에 주목했나.
A. 20세기 초에 근대적 산업화의 길로 들어섰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진 건 공예품이었다. 뛰어난 손재주를 바탕으로 좋은 공예품을 만들어서, 국ㆍ내외에 판매함으로써 산업화를 추진하는 마중물로 삼고자 했다. 대한제국은 장인들이 만든 공예품을 가지고 1900년에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참가해, 아시아대륙의 동쪽 끝에 대한제국이라는 나라가 자리하고 있음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 대한제국의 황실은 1908년에 ‘한성미술품제작소’를 설치해, 뛰어난 공예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일에 앞장을 서기도 했다.
20세기 초에 한국사람이 가진 꿈과 재주, 열정과 노력을 하나로 담아낼 수 있는 것은 도자기, 자개, 유기, 목기 등과 같은 공예품이 전부였다. 이런 까닭으로 어렵게 살아가는 속에서도 갖가지 공예품이 화려하게 꽃을 피우는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 20세기 후반으로 접어들어, 우리가 만든 공예품이 공산품으로 모습을 달리하여, 세계 곳곳으로 시장을 넓혀가면서 오늘날과 같은 대한민국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20세기에 만들어진 공예품과 그것의 역사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는다. 손으로 만든 우리의 물건이 우리의 역사라는 것을 너무나 쉽게 잊어버린다. 이런 점에서 20세기 공예품의 역사는 생활의 역사로서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만든 공예품들이 부서지고, 흩어지고, 버려지고, 사라져서 일상생활의 역사가 공백처럼 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20세기에 만들어진 공예품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일에 힘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소명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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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019년 4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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