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무라 요오코 도자개인전 2002. 3. 28~4. 3 갤러리 서미
‘발견된 오브제’가 발견한 세계
글 / 김소원 갤러리서미 큐레이터
경계를 오가는 것, 즉 틈새에 존재한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모호한 것, 뒤섞인 것(mixed)이 지닌 매력은 거부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퓨전 요리의 정통성(originality) 여부를 따지며 그 맛의 새로움을 외면할 것인가? 익히 알고 있는 클래식 곡을 샘플링(sampling) 했다고 해서, 수없이 시도되는 크로스오버(Cross-over) 음악에는 무조건 귀를 막을 것인가? 탈장르를 외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미래의 대안이 아닐지라도, 그것이 근대의 엄숙주의와 절대주의를 파함으로써 다양성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쾌거임에 틀림없다. 그 신선한 즐거움에 동반편승 한 요오꼬의 작품은, 3D 시뮬레이션 게임의 묘미처럼 우리를 실제와 상상 사이에서 노닐게 한다.
그 핵심은 ‘뒤집기’에 있다. 구태의연하게 석화된 기존의 관념들에 반기를 든 것이다. 요오꼬 작품의 반전은 재료의 탐구로 함축된다. 그것은 바로 스테인리스 철망(Stainless mesh)의 사용이다. 이 사소해 보이는 ‘발견된 오브제’의 사용이 지닌 힘은 생각보다 크다. 이른바 현대도예라 하는 전위도예는, 일본에서 1955년에 야기 가츠오(1918∼79), 스즈키 오사무(1926∼)등의 작가들에 의해 시작된 바 있다.
그러나 요오꼬의 작품이 전통공예이건, 전위도예의 맥을 잇건 그 여부가 중요하지 않다. 전통의 계승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 그 시대가 요구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문제라 한다면, 적어도 그녀의 작품은 그런 것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메쉬(mesh), 즉 철망 소재의 발견은 그녀를 자유로운 세계로 이끌었음에 틀림없다. 점토를 넓은 공간에 펼쳐 보고 싶은 그녀의 욕망과, 화로의 고열을 이겨내면서도 점토 고유의 부드러운 느낌을 살리고자 했던 의도에 가장 적합한 재료를 찾은 것이다. 메쉬를 흙과 함께 소성 함으로써,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는 것처럼 당위적인 명제가 전복되었다. 서로 뭉쳐야만 형태를 이루는 흙을 넓게 펼쳐 공간확장의 결과를 가져왔으며, 지지대 위나 바닥 위에 놓여져야 할 작품들을 벽이나 천장에 매닮으로써 중력을 제거하였다. 도예작품이 응당 지녀야 하는 당위성과, 점토가 지니는 한계 모두를 뛰어넘을 수 있었던 이 발견이 그녀에게 자유를 주었고, 그것은 곧 이 시대 미학과 상통하게 된다.
공간을 향한 원심력의 가동은, 수많은 포스트 모던 시대의 설치작품들이 그러하듯 ‘소통’에 대한 희망으로 풀이된다. 메쉬를 구부려서 만들어 내는 공간은 내부를 간헐적으로 비어있게 만드는 역할을 함으로써, 보다 건축적인 요소를 지니게 된다. 전시공간 안에 메쉬 작품이 어떻게 놓여져 어떤 작용을 하는가에 대한 그녀의 제시는, 바로 관람객들을 향해 던지는 현존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된다.
비어있는 공간과, 또 비어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한 채워짐, 내부로 감돌아 들어가는 시선과 동시에 외부로 뻗어 가려는 메쉬 작품의 속성은 끊임없이 돌고 도는 하나의 원을 형성한다. 결코 중단됨 없이 반복되는 모순의 공존-비어있음과 채워짐, 구심력과 원심력-이 빚어내는 하모니이다. 소통에 대한 관심은 또한 유기체적인 양식에 대한 그녀의 관심과 쌍을 이룬다. 도예가들이 가마 속 불의 변화에 의한 요변에 매력을 느끼고, 그것을 도기의 생기와 활력형성의 주요 매개체로 사용한다면, 그녀에게도 그녀만의 요변미학이 존재한다.
그것은 메쉬작품과 빛, 메쉬작품과 공간의 관계를 통한 요변이다. 메쉬를 통해 얻어진 리드미컬한 형태들은 빛의 변화와 더불어 유기적 형상으로 거듭난다. 마르크 샤갈이 여섯손가락을 지닌 자화상을 통해 또 다른 이름의 조물주가 되려 했다면, 자유로운 기지와 에너지 충만한 이 일본작가의 메쉬 작품은 이미 그녀를 그 세계의 군주로 추앙하고 있음에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