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린 도예전 2002. 10. 2∼10. 8 인사아트센터
이 린의 도예 그 환상적인 아름다움 글/신항섭 미술평론가
유화 12호 정도의 크기를 가진 평판에 마치 점묘법과 같은 전혀 새로운 시문을 하고 있는 최근 작가의 작업은 놀랄만한 성과를 보여준다. 이전까지는 한번도 본 일이 없는 전혀 새로운 표현이 출현한 것이다. 어느 면에서는 분청사기의 인화문화 유사하다는 인상이지만 제작기법이라든가 내용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이다. 제작기법으로는 인화문과는 정반대의 입장에 선다. 유약을 도드라지게 시문하기 때문에 양각의 형태가 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인화문은 음각의 형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바탕에 무수한 하얀색의 점이 반복적으로 나열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인화문과 크게 다르지 않게 보인다.
작가의 작품에 대해 눈에 보이는 사실만을 그대로 기술하자면 고려상감문양청자나 청화백자 또는 분청사기 따위의 전통적인 채색재료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채색재료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런데도 무수한 검은색 바탕 위에 흰색의 반점들은 도자기의 피부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철화, 청화, 진사 따위의 채색재료로 시문을 한다거나 인화기법 및 상감기법을 활용하는 따위의 전통적인 문양기법에 대한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검은색 바탕위에 흰색의 안료가 약간 도드라지는 형태로 얹혀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흰색의 채색재료는 청화와는 달리 그 자체로 부피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작업과정을 보면 이 흰색의 채색재료(또는 유약)는 거의 고체형태로 되어 있다. 마치 치약과 같은 형태인 것이다. 전통적인 채색재료인 철화 청화 진사 따위는 물에 풀어 액체 형태로 쓰는 데 비해 튜브나 주사기에 넣어 시문한다. 그리고 가마에 들어가 불에 녹으면서 마침내 유약으로서의 성격이 드러난다. 다시말해 그가 개발한 채색재료는 유약의 일종인 셈이다. 채색재료이면서 유약이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대형 평판에 펼쳐지는 흑백의 조화는 가히 꿈과 같다. 밤하늘에 뿌려지는 무수한 별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검은색 바탕 위에 흰색의 점들이 아주 단정한 모양으로, 또는 유약이 녹으면서 자연스럽게 일그러진 진주모양으로, 그리고 때로는 기묘한 선으로 변조되고 있다. 이들 여러 형태의 흰색 이미지들이 전개하는 합주는 우주의 쇼처럼 환상적이다. 점이 이처럼 아름답게 형상화되고 있음을 일찍이 본 일이 없다. 점묘법의 그림과도 비교될 수 없는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질서가 숨을 막히게 한다. 무엇보다도 도자기만이 지어낼 수 있는 그 차갑고도 매끄러운 감촉의 피부가 지닌 고상한 아름다움에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여인의 부드러운 속살과도 같은 도자기 표면에 주어진 감정의 흡착력이야말로 기존의 평면회화에서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부분이다. 도자기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 및 선입관을 걷어낸다면 그의 평판작업은 확실히 새로운 회화의 제안이라고 할만 하다. 인위적이면서도 그 평판화에는 인간의 지적인 조작이나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바꾸어 말해 불의 조화가 만들어낸 신비적인 요소가 있는 것이다. 그 신비적인 요소가 우리를 매료시킨다.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또 다른 형태의 조형적인 세계와의 만남에 우리의 미적 감수성이 흔들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