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일 도예전 2002. 4. 9~4. 17 토아트갤러리
계룡산 분청의 전통과 변주
글/최공호 미술사가
계룡산 자락, 금산의 깊숙한 산골에 가마를 박고 살아온 것이 어느덧 20여 년을 헤아린다. 고집스럽게도 도자의 정맥을 찾아 나선 길로 내친 김에 뿌리 내린 세월이 여기에 이른 것이다. 아무리 제작기법의 독자성에 기초한 도자공예의 경우라 할지라도, 그 기술이 보편화된 이상 원산지를 굳이 고집할 이유는 없어 보이지만, 남다른 그의 성정에 비추어 볼 때도 통 성에 차질 않아서 였으리라. 하나의 문화현상은 그것을 꽃피우고 열매 맺게 한 풍토적 이해가 전제되어야 비로소 입체적이고 완전해질 수 있는 법이다.
작가의 손길이 한 작품을 탄생시키는 과정에는 이미 작가 개인을 넘어서는 존재환경으로서 바람결, 냄새, 원근의 산이 그려내는 곡선들, 그리고 그 땅에 몸담아 사는 이들의 사유에 이르기까지 제반 요인이 유기적이고 총체적으로 작용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지역양식의 결정요인이다. 계룡산은 분청사기의 다채로운 양식 가운데 철화분청이라는 운치와 격조를 지닌 표현형식을 창출해 낸 모태이다. 홍승일은 철화의 전통을 배태해낸 본산지에 몸담아 스스로를 그 일원으로 온전하게 살면서 지역 전통의 문화적 에너지를 직접 길어 올리려 애쓰는 것으로 보인다. 물아일체까지는 아니더라도 돌아갈 가치가 있는 친자연적인 삶의 실천을 통해 자신의 제작환경을 스스로 완성하려는 의지가 남다른 것만은 부정하기 어렵다
. 이러한 몇 가지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좋은 나침반을 얻게 된 셈이다. 그동안 그의 작품은 앞에 언급한 데로 철화분청의 독특한 운치와 조형율에 심취해 있었다. 어깨가 튼실하고 욕심 없이 너그러워 보이는 기형에 철화의 텁텁하고 까실한 회화적 운필이 가해져 빚어낸 서정적 공간이 일정한 깊이와 폭을 갖게 되었다. 한편, 청채분청이랄까. 코발트 안료와 분장토 기법을 접목시킨 근래의 시도는 전통을 자신의 언어로 새롭게 해석해낸 하나의 성과로서 주목을 끈다. 짙은 코발트 바탕위에 백유를 시유하고 무늬를 선각으로 긁어냄으로써 선각의 틈새로 배어나는 청화빛이 분청 특유의 운치와 격조를 한층 강화한다.
또한 두텁게 바른 분장토가 마른 뒤 긁어 새긴 무늬가 조각도를 따라 마른 흙이 파쇄되면서 마치 일도각법으로 새긴 전각처럼 거칠고 자연스런 흐름을 얻는 작업도 시도하고 있다. 홍승일의 작품에는 초봄의 매화등걸, 산수유 향기가 묻어난다. 자연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시선이 아니라 그 스스로 몸담아 살면서 내면에 귀기울이고, 그 리듬에 몸을 내맡겨 빚어온 세월의 두께가 켜켜이 쌓인 탓이다. 흙내음, 사람냄새도 물씬하다. 흙 속에 묻어온 시간의 내공이 그만한 경지에서 우러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