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E ③
파란 눈, 파란 도자기
김선애 도예가
WHITE
‘흰색은 가능성으로 차 있는 침묵이다. 그것은 젊음을 가진 무이다. 정확히 말하면 시작하기 전부터 무요, 태어나기 전부터 무인 것이다.’
-칸딘스키
중국 청화백자는 유럽에서 블루 앤 화이트 포셀린Blue and White Porcelain이라 불렸다. 청화라는 의미는 ‘청색의 안료로 그림을 그리다’라는 뜻이고, 여기에 백자라는 단어가 합해져, 기본적으로 순도 높은 하얀 바탕에 청색의 코발트 안료로 무늬를 그리고 구워낸 도자기를 뜻하게 되었다. 청화백자, 철화백자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장식된 안료에 본래 도자기 종류를 결합해 이름을 붙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어의 Blue and White Porcelain 라는 이름을 살펴보면 ‘파랗고 하얀 자기’를 뜻한다. 파란색을 뜻하는 ‘BLUE’가 앞에 와서 그 의미가 강조되었지만, 염연히 white도 제 한몫을 한다. ‘AND’로 엮인 동급의 관계이다. 무엇이 바탕이고 무엇이 주제가 되었는지 이름에서 결정지어진 것은 없다.
흰색은 때때로 무색으로 간주되곤 하지만 흰색은 빛으로부터 왔다. ‘자연에는 흰색이 없다’ 라고 생각한 인상주의자들은 색을 내적 음향으로 생각했다. 칸딘스키 또한 ‘흰색은 죽은 것이 아닌, 가능성으로 차 있는 침묵’이라고 이야기 했다. 죽어 있지 않고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침묵은 빛의 색인 RGB의 교집합과도 같다.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모든 것을 합한 색인 것이다. 그래서 무한이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성질을 지녔다.
몽골에서는 흰색의 의미가 특별하다. 색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몽골 문화에서 하얀색은 어머니를, 검은색은 아버지를 상징한다. 몽골인은 하얀색 게르에서 하얀 가축의 젖으로 만든 유제품인 하얀 음식을 먹고 마신다. 몽골인들이 가장 즐겨마시는 우유차인 수태차도 마찬가지이다. 기도와 음복에 사용하는 은잔 역시 흰색을 상징하며 늘 품에 간직한다. 징기스칸 대학 부총장인 르카그바슈렌은 인터뷰에서 ‘몽골인들은 흰색을 가장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어머니의 흰 젖보다 더 선한 것은 없다고 봤지요. 옛날부터 좋다고 여겨지는 많은 것들을 흰색과 관련해서 설명하고 숭배해 왔습니다’1)라고 이야기한다.
조선 시대의 미적 사상에도 흰색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조선 시대 사림파숲에 묻혀 글공부를 하는 사람들의 성리학적 이상을 담은 도자기는 맑고 투명한 백자로 청렴하고 결백한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선비정신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던 것이었다. 청렴함에는 부단한 자기 노력과 내면 성찰의 과정이 필요한 것처럼 그 정신을 대변하는 백자 또한 만들기 어려웠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백자토는 그 자체로도 불순물철이 많기 때문에 철 성분을 걸러내기 위한 힘들고 고된 수비 과정을 거쳤다. 가마에 붙어있던 철 성분 또한 표면에 붙지 않게 하려고 갑발을 씌워 구웠다.
ENCOUNTING BLUE
파란색은 본래 손댈 수 없는 색이었다. 푸른 하늘과 바다는 볼 수는 있어도 직접 만지거나 잡을 수는 없다.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그 색은 우리 눈 앞에서 사라지고 만다. 고대 중국에서는 화학자들이 동copper, 바륨, 납과 수은 등을 섞어서 파란색을 만들려고 애썼는데 불행히도 이 광물들이 독성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중국 황제들은 중금속 오염으로 고통받았다고 한다. 중국 황제들도 쉽사리 얻지 못했던 파란색의 열망은 계속 이어져 국가가 파란색을 관리하였다. 금보다 비쌌던 청색 안료와 화이트 골드라 불린 도자기의 조합은 럭셔리의 상징이었다. 동양의 색을 표현한 Exotic이라는 단어는 ‘이국적인’ 이란 뜻으로 낯설고 색다른 문화에 대한 궁금증, 관심, 열망이 가득했던 18세기 유럽인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시누아즈리Chinoiserie와 함께 당시 문화 키워드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이러한 트렌드와 함께 18세기 유럽은 소비 사회가 탄생한 시기이기도 하다.2)
아시아 도자기를 처음 바라본 그들의 눈에 비쳐진 아시아의 도자기는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필자가 어렸을 때, 외국인들을 바라보며 우리와 다른 눈 색깔에 신비함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파란 눈동자로 바라보는 세상은 왠지 파란 셀룰러지 종이로 본 세상일 것만 같았던 시절이었다.
유럽에 전해진 최초의 자기는 아일랜드 박물관National Museum Ireland에 있는 폰트힐 베이스Fonthill Vase, 1300~1340라고 불리는 청백.白자기로 중국 원시대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경덕진에서 생산된 것으로 유일하게 문서에 기록되어 있어 14세기 초부터 현재의 행적을 알 수 있다. 이 자기는 헝가리,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을 거쳐 아일랜드로 전해졌다. 참으로 삶의 여정이 복잡하다. 이 도자기를 직접 눈으로 보고서야 유럽인들은 마르코폴로가 묘사했던 중국 도자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의 눈으로 보고 만져보고 난 후에 단단한 조개껍데기를 뜻하는 포셀린이라 이름 붙였다.3)
도자기 전에 유리잔과 주석 그릇을 사용했던 유럽인들에게 이러한 청화백자가 손에 들어왔다고 상상해보자. 아름답고, 단단하며 닦기도 쉬운 이 도자기는 ‘신비의 돌’ 쯤으로 생각됐을 것이다. 손으로 두드리면 영롱한 색을 내고충격을 가하면 깨진다고 누군가 전해주었을 터이니 무엇보다 소중히 다루었을 것 같다. 더군다나 ‘워너비 칼라’였던 파란색까지. 그래서인지 유럽에 전해진 초기 중국 도자기를 보면 금속으로 마운트 된 경우가 많았다. 일반적인 찻잔도 높은 금속 받침을 만들어 그들의 식, 예절 문화와 장식의 용도에 맞게 사용되었다. 손잡이가 없는 중국 찻잔에 높은 은 받침을 연결해 마치 와인잔처럼 만든 경우도 있다.4) 동양인의 눈으로 보면 무척이나 새로운 것은 마찬가지이다. 색이 화려한 중국 도자기에 은식기에서 볼 수 있는 친근함 그리고 다른 재료가 더했을 때 보이는 생소함 또한 작품에 다른 아우라를 내뿜는다. 도자기의 형태가 은식기에서 많이 유래한 점도 이 조합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추측해본다. 또한 실버스미스, 메탈스미스 장인은 도자기의 깨지기 쉬운 부분을 금속으로 감싸며 당시 로코코 양식에서 영향을 받은 유럽 특유의 화려함과 스타일로 감쌌다.5) 도자기를 보호하는 또 하나의 방식으로 보관하는 함도 발견되는 경우가 많으니 이 또한 보호차원의 역할도 있었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 즐기기보다는 최상의 기술에 최상의 기술을 더한, 지극히 화려함과 유럽사람들의 재해석된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화가 지금의 예술작품, 문화의 다양성을 바라보는데 한몫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EXCHANGING BLUE
Blue(1), (2)편에 소개되었듯이 푸르른 바닷길을 통해 중국은 이슬람 문화로부터 파랑을 받았다. 중국에 들어온 파랑은 중국 자기 기술의 발달에 의해 재해석된다. 이슬람 지역의 도기와 달리, 중국은 고온을 견디는 고품질의 흙이 있었고, 산화코발트를 들여온 후 오랜 기간 동안 실험을 한다. 유약 원료와 산화코발트를 함께 유리질화 시킨 후 분쇄하여 물과 섞어 안료를 만드는 방법을 개발하였다.6) 이렇게 하면, 높은 온도에서 발색 되어 지금 우리가 아는 코발트의 파란색을 내는 효과를 가져다 준다. 이렇게 변신한 산화코발트로 그림을 그린 청화백자는 다시 이슬람 지역으로 전달되어 중국 자기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릴 뿐만 아니라 이슬람 사람들 또한 중국의 청화백자를 모방해 16~17세기 이즈니크Iznik 도자기라고 불리는 이러한 이슬람 도기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하생략.............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018년 1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