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ONYM #1」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에 따라 그 중요성을 비교해야 한다면이 세상의 모든 가벼운 존재들은 무의미한 것일까? 흙은 무겁다. 그리고 인간은 끝에 그 무거운 흙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나는 가볍지 않은 무거운 흙으로 작업을 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도자기라는 무거운 이름을 갖게 되지만 실제 나의 작품에 무게는 가볍다. 무게의 가벼움 때문에 그 의미가 무의미할 수 있고그 끝이 무거운 인간이 감내해야 할 삶과도 거리가 있다고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무거움이 주는 존재의 큰 의미들을 가벼이 하고 싶었다. 무거운 것이 중요한 것이고 가벼운 것이 반드시 하찮은 것이어야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의 작업은 무거운 흙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 흙덩이들을 물에녹이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마치 흙이 퇴적되듯 그 흙물을 수백 번의 붓질로 철망위에 쌓아 얇은 흙판을 만든다. 수백번의 반복적인 붓질 속에 흙만 쌓이는 것이 아니라 시간도 함께퇴적되어 간다. 1초, 1초의 시간이 쌓여 1분이되고 다시 10분 …한 시간… 그렇게 그 시간들 역시 나의 붓질과 함께 겹겹이 쌓여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 흙판은 본래 흙이 주는 무거움과는 달리가볍다. 그러나 그 쌓여진 흙물의 퇴적된 겹들과 무수히 반복되는 내 행위들로 덮여진 시간의 흔적들이 실제 그 가벼운 무게와는 달리 한없는 무게감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붓질이라는 반복된 행위 속에 나의 머리 위로는 행복이 스쳐가기도 하고 때로는삶의 무게에 눌려 힘들게 그 붓질을 이어가는 날도 있다. 그래서그 흙 판에는 나의 감정도 함께 스며 있다.
그렇게 굳어진 흙판은 가마에 들어가 초벌이 되어 나온다. 흙판은 소성을 통해 도자기가 되고 도자기가 주는 그 본래의 존재성은 무거움이지만 나의 그것은 여전히 가볍기만하다. 다시 그 위에 이제는 색으로 무게를 입혀주고 재벌소성을 한다. 1260도의재벌 후부터는 그 표면이 부스러지고 갈라져 떨어져 나간다. 마치함께 쌓여있던 나의 감정이 실제로 드러나듯 말이다. 하지만 드러난 감정을 숨기고 싶어 나는 애써 부서지고 갈라진 틈들을 흙물로 메우고 덮어 말린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나는 다시 조심스럽게 그것들을 벗겨낸다. 덮여졌던 흙들을 벗겨내면서 차츰 그곳에서 들어나는 색과 표면은 더 이상 가벼운 것이 아니다. 또 다시가마에 들어가면 이제 그 표면이 완전히 고착되고 존재의 가벼움이 오히려 보는 이로 하여금 참을 수 없는 무게를 만들어 낸다.
이 가벼운 존재들은 유사성과 비유사성에 따라 두 개 또는 네 개로 모아 그 안에 담겨진 감정이 표현되도록 한다. 나는 이것들을반의어ANTONYM, 동의어SYNONYM, 다의어POLYSEMY라는 제목으로 구분한다. 사실 인간의 감정은 미묘하여 하나의 상태로는 단정하기 어렵다. 이런 미묘한 감정들은 그와 반대되는 감정을 통해 서로의 상태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에 상응하는 반대적인 존재가있어 그 존재가 분명해지고 비슷한 게 함께 있을 때도 마찬가지로 서로의 존재를 확실하게 해준다. 또 다양함이 그 안에 하나를 더 분명하게 한다. 작품에서 드러나는 감정들은 이 반의적 상태로 충돌하거나, 때로는 서로 보완하고 동의하는 상태로 의지하거나, 또는 다양한 연결성을 갖고 풍부한 감정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오늘날의 언어가 하나의 어원에서 반의, 동의, 다의 등으로 무한하게 확장된 데에는 인간의 복잡한 감정을 보다 분명하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작업 중 마크 로스코의 “나는 추상화가가 아니다. 나는 그저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을 표현하고 싶을 뿐이다.” 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되뇌고 그렇게 되길 소망한다.
내가 존재의 무거움을 가벼이 하고 싶은 이유에는 의미를 강요하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다. 강요가 상대방에게는 상처가 될 수있고 예술작품이 직접적인 물리력을 갖지는 않는다 하여도 지나친 의미의 강요는 보는 이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막 마흔을 넘은 나의 삶도 그동안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사실 상처투성인 나의 무거운 삶은 늘 치유를 필요로 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이 작업을 통해 그동안 받았던 마음의 상처들을 치유하고 싶었는지도… 그렇게 수양과도 같은 긴 작업의 과정들이마음의 상처를 하나 둘 치유했듯이 이번 전시회를 통해서 메아리처럼 서서히 사람들의 마음에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가지고 있는 가마의 여건상 크기를 키울 수 없다는 것이 본의 아니게 갖게 된 한계였다. 그러나 그 한계를 극복하고자 다시노력중이다. 그래서 도자기지만 크기가 커져도 그 변하지 않을가벼움과, 비록 가볍지만 그것이 줄 참을 수 없는 존재감을 기대하며 다시 작업을 시작한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9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