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étempsycose-2」, Ø100x75cm_Oil & Acrylic on Canvas
그의 전시장에서는 사람들이 원형의 청자도판 그림을 두드려보는 진기한 풍경이 벌어진다. 도자기 유면의 미세한 균열까지 닮아 있지만 손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둔탁한 소리가 이것은 도자기가 아니라 면으로 만들어진 캔버스라는 것을 알린다.
올해로 14년차 회화작가 문수만은 원래 기계공학을 전공한 공학도였다. 처음에는 세밀화로 꽃과 나비를 그리기 시작했다. 줄기는 있지만 땅과는 연결되지 않은, 날아가는 형태의 꽃들이었다.자유롭고 싶은 마음을 담기 위해 화분에 심어진 꽃은 그리지 않았다. 하늘을 날던 나비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박물관에 박제된 모습을 본 후에는 그것을 재현하는 것으로 작업을 이어갔다. 화가가 되고 싶었으나 오래 다른 일을 해야만 했던 시절과 36살 젊은 나이에선고받은 위암 투병의 시간 모두가 그에게는 박제된 나비와 같은 삶이었던 셈이다. 갇혀있는 곳에서 유리를 깨고 나오기 위해 필요한 힘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박제된 자유’라는 연작은 3년의 시간을 들여 완성됐다. 돋보기로 보아야 하는 나비의 털 한올 한올과 점묘기법으로 완성된 수많은 점들을 지닌 실제 비율에 가까운 하나의 나비를 그리는 데에는 하루 평균 15시간의 작업량으로 약 15일이 걸린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새 그는 이 지난한 작업에 또 하나의 새로운 시도를 얹어 고행을 자처하기 시작했다. 흙과 불로 완성되는 도자기, 그 중에서도 색을 잡기 어려운 청자를 캔버스로 옮겨 온 것이다.
도공의 그림
최근 개인전2015.2.26.~3.11, 청주 gallery H에 선보인 작업들은 한눈에 봐도 작업량이 상당해 보였다. 원형의 캔버스 위에 청자도판을 그리던 그가 이번에는 팔이 닿지 않을만큼 넓은 직사각형의 캔버스에 정조대왕의 행차 8일을 기록한 그림을 재현했다.그가 지금까지 그려 온 그림은 대부분 나비가 주제였는데 청자도판을 그리면서 ‘환생한 도공’이라던지 ‘도공의 날개’라는 주제로 전시를 구성하고 있다. 이유를 물으니 “천 년 전 도공의 입장이 되어본 것”이라는 답을 돌려준다. 다들 그릇이나 도자기의 아름다운 선을 만들고 있으므로 자신은 임금님의 수라상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상감청자 기법을 도입해서 커다란 원형 도판을 그려내기까지 무수한 실패 속에 지금의 기법을 발견하게 된 것인데, 그 과정이 마치 실제 도공이 된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예전 도공들이 살아온 삶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내가 다룰 수 있는 재료로 그들의 마음을 알아보자는 심보랄까, 그랬어요. 가장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은 당시에 천민이었던 도공들이 만든 것이 지금은 국보와 보물이 되었는데, 선조들에게 당신들이 만든 것이지금 어떻게 대접받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도공을 나비로 환생시킨 것이에요. 그리다보니 내가 진짜 도공도 된 것 같고, 나비가 된 것도 같고 이런 저런 착각에 빠지게 되더라고요. 캔버스 위에서 상상은 자유니까. 처음 제 그림 속 나비는 자유를 갈망하는 나비였지만 지금은 시간을 초월해 넘나드는 매개체로서 전령의 역할을 합니다.”왜 하필 청자였을까. 색을 내기도 어렵고 잘못하면 촌스러운 색이 되기 십상이지만 그가 청자를 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가장 한국적인 것에 도전을 해보자해서 청자를 배경으로 시작하게 됐어요. 사실 백자로도 시도해봤는데 청화백자는 원하는 느낌이 잘안나더라고요.”그가 선보이는 다양하고 화려한 문양에 청화백자보다는 청자가 더 적합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문양은 주로 기존의 국보나 보물들의 문양을 응용하고 재배열해 작업한다.(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현대미술관 소장품 도록을 선물받았는데, 받자마자 든 생각이 ‘이것으로 5년은 그릴 수 있겠다’였다고.) 실제로 수집한 자료들의 문양 형태를 일러스트 프로그램을 이용해 디지털로 복원하고 이후 모티브를 가지고 디자인한다.그가 그리는 청자도판은 전통 도자 기법인 상감의 방식과 거의 같다. 흙에 흔적을 내고 흙물을 덮어 표면을 갈아내는 상감처럼 투명한 필름을 활용해서 문양의 색을 배열한다. 바탕이 되는 캔버스에 밑작업을 하고 플로터로 출력한 필름을 붙이고 다시 물감을올린다. 재단된 필름을 순차적으로 걷어내면 문양이 남는다. 그 위를 다시 물감으로 덮으면 두께가 요철을 만들고, 그 위를 다시갈면 매끄러워지면서 아래 깔려있던 색이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반복해서 물감을 쌓아도 약 1.5mm의 두께밖에는 만들 수없는데 기계로 갈아내면 이것마저 모두 날아가기 때문에 오른 손에 사포를 쥐고 왼손으로는 굴곡을 확인하면서 갈아나간다.
그의 그림을 진짜 흙으로 만든 도판이 아닌가 의심케 하는 것은 ‘균열’이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도자기의 유면처럼 물감 위로 미세한 균열이 가득하다. 보통 물감의 갈라지는 효과를 낼 수 있는 크랙미디움은 갈라짐이 거칠고 인위적이어서 도자기 유면의 느낌이 아니다. 그가 사용하는 방법은 바니쉬라던가 본드 성분의 젤 미디움 같은 보조제로 많이 쓰는 재료들을 혼합해서 크랙을 만드는 것이다. 지금같은 효과를 내기 위해 하나의 시편을 만들어 10번 정도 테스트를 하고, 비율에 따라 달라지는 미묘한 차이를 비교하기 위해 300번이 넘는 실험을 거쳤다. 도자기 유면처럼 자연스러운 균열을 발견한 시편에 “나는도공이다!”라는 메모까지 남긴 것이 이해될 만한 노력이다. 이렇게 오래 연구한 자신의 작업과정과 재료에 대한 비밀은 작가의 ‘노하우’인데 그것을 설명하고 공개하는 일에 그는 별로 불편해하지 않았다. 온라인 동영상 사이트Youtube에는 전 작업과정을 촬영한 영상을 직접 올리기도 했다. “제 작업은 장인정신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에요. 그 정신으로 만든 도공의 힘든 삶을 재조명하고 전하기 위해 그리는 것이지요. 기술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서 모든 기법을 공개할 수 있습니다. 기법은 실험하면서 발견하는 거니까요. 무엇을 이야기 할 것인지가 중요하죠.” 그리고는 그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에 대해 들려줬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3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