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이인진 전시는 도자의 독립된 공간보다 기물들을 쌓아놓은 「집적」 형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도자 설치는 2006년 이후 꾸준히 조심스럽게 보여 왔다. 기물이 겹쳐지고 쌓여있는 모습을 조형화시키는 설치작업이 이번 전시를 통해 본격화된 느낌이다. 오늘날 오브제의 집적은 소비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산업사회 폐기물을 쌓아 놓는 키치적 의미로 해석된다. 즉, 물질의 풍요와 기계화된 삶을 상징적으로 조형화시키고 비판하는 오브제 작품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인진의 「집적」 작업은 사회비판적 의미와 달리 도자의 집합적 조형 문제와 장식적 공간의 조형적 실험이다. 이는 도자의 디테일한 부분이나 전체적 볼륨을 통해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나가려는 미적 탐구인 것이다.
기본적으로 그의 도자는 물레성형의 항아리와 접시 등 기器의 형태를 만들고 장작가마에서 무유소성으로 제작된다. 특히 이인진 작품은 “불길과 나뭇재의 날림에 따라 다양한 표정을 지니며…… 이것은 인공적이 아닌 자연의 섭리를 추구하는 예술”임을 확인시키고 있다. 이러한 그의 도자 예술을 그는 새로운 조형언어인 「집적」 작업을 통해 공간을 조형화시키고 확장해 나가려 한다. 나아가 변화된 공간 속에 그의 도자들이 고유의 독자적 형과 색에 깊이를 상실하지 않고 감상자와 교감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때로 장식적 환경미술처럼 보이는 「집적」이 인정받을 지는 미지수이다. 혹시나 개체성을 잃어버리고 장식성과 공간 실험에 치우치지 않나 하는 우려도 나타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독립된 기물들은 결코 생명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어디에 놓여있던지 그의 항아리와 접시들은 살아 숨 쉬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린다. 이는 초기 제작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뚝심의 작업과정을 통해 형태의 단순과 소박함, 그리고 투박한 표면에 나타난 시간의 깊이 등이 끊임없이 생성되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번 전시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고가구나 탁자, 책장과 철망처럼 고정된 망에 다양한 형태의 도자가 설치되고, 벽면과 바닥 등에 놓이면서 공간 전체가 하나의 작품으로 변모하는 점이다. 오브제와 기물들의 구성은 조화로운 공간을 추구하면서 전시장은 마치 연극 무대처럼 변해 나간다. 감상자는 기물 하나하나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기보다 확대된 전체를 보게 된다. 관객이 된 감상자는 쌓여진 기물들을 통해개개의 독자적 표정과 전체의 조화를 생각하는 것이다.
나아가 그의 「집적」 시리즈는 우리의 원초적 감각을 흔들어 놓는다. 가구나 집기들 사이에 위치한 기물들이 질서를 무시한 듯 쌓여있다. 그의 작업장에 들어서면 누구나 놀라는 것이 엄청난 양의 작품들이다. 1층 작업장과 2층 작품 보관 설치대에는 그동안 제작된 항아리와 접시, 컵을 비롯하여 조형적 기물 등이 넘쳐나고 있다. 전시장에 그가 쌓아 놓은 많은 도자들의 「집적」은 일종의 기분풀이가 아닌지, 아니면 전통이나 보편적 미의 의도적 파괴는 아닌지 등등 이러한 유희론과 의미론을 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장식성을 극대화시킨 「집적」의 설치작업은 도기의 기능보다 현대적 공간구성에 필요조건을 갖추고 있다. 작품이 갖는 의미에서 실용보다 개념이 중요시되며 새로운 해석으로 가능성을 확대시키고 싶다.
결과적으로 이인진의 「집적」은 오히려 기물의 독립적 존재감과 생명감을 강조한다. 작가의 의지 표명으로 이들 개체는 흙과 불이 만들어내는 원초적 예술성을 간직하면서 공간을 장식화하고 확대시켜 나가고 있다. 그의 기물들이 보여주는 단순과 소박한 형태, 그리고 장작가마의 무유소성에 의한 자연의 색채가 오히려 미감을 극대화 시켜나가면서 「집적」은 도자예술의 새로운 환경 창조라는 과제를 던지고 있다. 이는 새로운 현대도자의 가능성과 해석을 보여주며, 나아가 그의 실험이 관객의 미적 호기심을 자극시켜 소유의 욕망을 부채질하기도 한다. 「집적」 시리즈의 수많은 개체들이 자기 자신을 뽑아 달라는 아우성 속에 유쾌한 절충주의 해석도 조심스럽게 시도해 본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4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