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관 10주년을 맞이한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 지나온 10년을 돌아보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10년을 위해 ‘흙’의 의미를 재 정의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순수미술, 도자, 건축 등 3가지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총 8명(혹은 팀)의 작가들은 다양한 시선으로 ‘흙’을 바라본다. 흙에 대한 보다 넓은 의미를 껴안기 위해 전시는 ‘지구Earth’라는 바탕위에 놓여졌다.
EARTH ― 땅, 그리고 흙
불의 고리가 일어났다. 대자연이 꿈틀거리는 작은 움직임에도 인간에겐 몇 백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큰 파장으로 밀려든다. 자애로운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돌연 표정을 바꾼다. 품안의 모든 걸 내어줄 것 같았던 자연은 돌연 무표정으로 인류에게 재앙을 던진다. 며칠 전 일본으로 조금 이른 휴가를 떠났던 친구의 증언이 섬뜩하다. 생경한 흔들림에 잠에서 깨어보니 묵었던 여관방의 텔레비전이 바로 머리맡에 떨어져 있었고 본능을 따라 뛰쳐나간 발걸음 앞으로 땅은 보란 듯이 갈라졌다.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의 속수무책을 온몸으로 경험한 친구는 다행히 아무 탈 없이 귀국했지만 생에 다시없을 두려움을 느꼈다고 전했다.
땅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다. 인간이 선택한 생존방식은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다른 생명체와는 반대로 자연을 거스르고 이용하는 것이었다. 의식주 모든 근원엔 흙이 있다. 땅을 이용해 식량을 키우고 집을 짓고 흙과 불을 이용해 그릇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인간다운 삶의 영위가 가능했다. 인간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자연 앞에 작은 존재이나 생존을 위해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들고 짓고 이내 부순다. 현대에 이르러 인류가 가지는 흙에 대한 사유는 신화가 지배하던 시대의 막연한 경외감 이상의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
진앙 ― 강력한 땅의 힘
밀물과 썰물과 밤과 낮을 만드는 것. 시간이 흐르고 공기가 머무를 수 있게 만드는 것. 우리를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 중력은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강력한 힘이다. 신체가 느끼지 못하는 물리적인 힘은 때때로 관념의 세계를 파고든다. 작가 오윤경은 ‘흙’아래, 보다 근원적인 힘에 집중한다. 모빌을 닮은 작품은 사실 돌에 메여있는 커다란 헬륨 풍선이다. 중력이란 비가시적인 힘은 돌로 치환되고 언제든 우주로 날아갈 듯한 풍선은 꼿꼿하게 서있다. ‘역易모빌’의 형상은 거울처럼 매끈해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과 함께 공간의 모습을 흡수한다. 마치 모든 것이 거꾸로 뒤집힌듯한 환상.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흙으로부터 오는 거대한 힘을 작가는 오히려 작고 사소하고 가벼운 것들을 통해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지층 ― 시간의 순환과 쌓임
작가 차기율은 쌓이고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흙의 의미를 끄집어낸다. 「고고학적 풍경-불의 만다라」는 소멸과 생성을 반복하는 순환의 이미지를 흙으로 표현한다. 지구의 자전이 만들어내는 밀물과 썰물 사이에 ‘게집’이 있다. 순간 존재하는 게집은 자연의 집이면서 게가 드나든 시간의 흔적이다. 작가는 게집 20,000여 개를 번조해 한 곳에 모아 고고학적 풍경을 만들어낸다. 지나가 버린 시간에 대한 천착은 ‘본질’이 여러 조건에 따라 변할 수 있다고 말하는 만다라Mandala와 맞닿아있다. 흘러 마땅해야 할 시간을 불로서 고정시키는 행위는 인간과 자연을 둘러싼 순환적 관계에 대한 파악과 포획이다.
각기 다른 환경에서 퇴적된 흙은 시간의 순서대로 쌓여 땅의 나이테가 된다. 지구의 수직적 연표에 본격적으로 인간이 끼어든다. 도시가 생겨나면서 인간은 흙을 파내기도 하고 그 위에 자갈을 깔기도 하고 또 그 위에 아스팔트를 덮기도 한다. 자연히 생겨날 수 없는 곳에 백토를 옮겨오기도 하고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들은 자연으로부터 온 나뭇가지, 잎사귀, 마른넝쿨과 뒤엉켜 새로운 지층을 형성한다. 작가 정소영은 새로운 지질, ‘Urban Geology’를 탐구한다. 미술관 주변의 흙을 채집해 건축에서의 첫 번째 노동의 과정인 채질이라는 행위를 차용하여 지층을 분리한다. 작가는 적층된 시간을 분리하는 행위를 통해 인간이 맞닥뜨린 새로운 생태계와 그 위에 공간을 구축하는 과정을 관찰한다.
흙 ― 개인적 언어
자아를 표현하고자 하는 본능, 인간의 자유의지는 흙을 생존의 영역에서 영적영역, 예술의 영역에까지 끌어들인다. 예술가는 본디 영적인 존재, 샤먼shaman에서 출발한다. 풍요에 대한 강력한 염원은 영매靈媒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만들어낸다. 도예가의 작업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들은 내면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매개로 흙을 택할 뿐이다.
작가 이지숙은 흙을 자유롭게 빚어 개인적인 추억과 사유를 담은 그림을 그려낸다. 테라코타 위에 채색하여 만들어진 「부귀영화 - 불멸」은 민화가 그려진 병풍의 이미지를 가져와 가장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행복을 보여준다. 차와 책이 함께 있는 풍경은 오랫동안 책읽는 괴로움과 즐거움을 맛본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 투영되어있다. 연필을 잡은 손대신 흙을 움켜진 손을 택한 그녀는 유약한 종이 대신 견고하고 육중한 도자로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5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