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란 음식과 그릇의 관계다. 예술이기 이전에 도자는 일상 속에서 늘 사용하는 접시였고 잔이었다. “담는다”는 말과 함께 도자는 우리 삶과 함께 해왔다. ‘식사’의 순간에 음식을 돋보이게 담는 용기로 ‘보조적인 기능’을 하면서도 밥을 먹을 수 있게 하는 필수 요소다. 그렇기에 도자기에는 생이 묻어있다. 도자기에서 삶을 엿보는 작가가 있다. 영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김선애의 작품은 궁금증을 일으킨다. 그녀는 도자기에서 대체 어떤 생을 읽어내고 있는 것일까.
도자와 식문화의 접점에서
문화란 한 사회가 공유하는 행동양식이다. 그중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기본 요소인 의·식·주의 범주 안에서 ‘식문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먹는 즐거움’을 탐하는 인간의 본성은 다양한 음식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식문화를 낳았다. 작가 김선애는 영국에서 유학하면서 한국과는 사뭇 다른 식문화에 대해 깊은 호기심을 갖게 됐다. 제삼자의 시선으로 본 그들의 문화는 작품으로 녹여낼 만큼 흥미로운 주제였다. 역사를 좋아하는 성격과 궁금한 것이 생기면 바로 도서관을 찾는 습관은 작가로서 하나의 주제를 더욱 깊이 사유하게 만들었다. 당시 요리사를 꿈꾸며 공부하는 동생과 함께 생활하면서 음식과 연결된 다양한 이야기들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던 환경도 한몫했다. 본디 그릇이 담는데 기능성을 둔다면 그 위에 다양하게 담기는 음식들에게도 분명 도자와 관련된 숨겨진 이야기가 있을 터. 작가는 도자기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도자가 전하는 흥미로운 일상
술 마시는 일이라면 한국 사람도 어디서 빠지지 않지만 영국 사람들은 보다 더 깊은 일상 속에서 술 문화를 향유하고 있다. ‘펍Pub 문화’로 지칭되는 영국의 술 문화는 오늘날 한 손에 맥주를 들고 축구를 보며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등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작가는 영국의 술 문화에 대해 관심 갖게 된 계기로 영국의 ‘피겨린figurine’을 말한다. 술 마시고 싸우는 사람들, 거하게 취해 길바닥에 누워버린 사람 등등 도자기 위에 그려진 일상적인 장면들을 보고 작가는 술 문화와 도자기의 상관관계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금주운동이 성행했던 19세기에는 홍차에 술을 타지 말아달라는 문구가 적힌 개인 찻잔들이 발견되기도 하고, 술자리 게임을 위한 구멍 뚫린 도자기 술잔이 나타나기도 한다. 지금처럼 유리 잔이 널리 퍼지지 않았을 당시, “술맛은 머그컵이 최고!”라 평했던 작가 ‘조지 오웰’의 코멘트가 신기할 따름이다. 김선애 작가는 19세기 이전, 술 문화의 중심에 있던 도자기를 21세기로 다시 불러왔다. 화이트큐브 안에서 진행된 퍼포먼스 겸 발표회에는 기이하게 생긴 도자술잔을 든 관람객들로 가득했다. 작가는 이 재미난 퍼포먼스를 통해 먹고 마시는 행위에서 도자기가 어떻게 다양한 모습을 갖출 수 있는지에 대해 보여줬다.
도자기에 펼쳐지는 역사와 기억
김선애의 작품 뒤에는 늘 철저한 리서치가 존재한다. 하나의 개념과 작품을 위해 1년을 꼬박 리서치에 쏟은 적도 있다. 이렇게 연구에 공들이는 자세는 역사 속에서 도자문화를 온전히 읽어 내려 하는 작가의 마음이 깃들어있다. 썩지 않아 오래도록 보존되는 도자기는 일상생활에서 밀접하게 사용되는 것이기에 옛사람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가 된다. 도자가 전해주는 역사를 통해 작가는 도자가 기록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앞으로 몇 백 년 후의 사람들에게 지금의 우리 모습을 도자기로 전할 수 있지 않을까? 작가는 도자 위에 ‘현재’를 기록한다.
18세기, 19세기 영국의 식탁 위에서 테이블 세팅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피겨린은 우리 주변의 실제 인물들을 그리거나 당시 유명했던 스타들을 그려 넣었다. 처음에는 충성심의 표현과 정치적 의도를 갖고 사용됐던 피겨린은 점차 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유도하는 ‘토킹 포인트talking point’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전한다. 작가는 이 피겨린 위에 지금의 일상을 그린다. 오늘날에 이르러 더 이상 토킹포인트로서 역할을 하지 않는 피겨린은 작가를 통해 시대상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된다.
「Pot Diary」도 기록하는 매체로서의 도자기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집트 유물 전문 박물관인 런던 피트리 뮤지엄The Petrie Museum에서 참가한 레지던시프로그램을 마무리하며 작가는 도자 파편 위에 그날그날의 일상을 기록해 전시했다. 파피루스가 귀하던 시절 깨진 도자 조각은 메모지로 쓰였다고 한다. 오늘의 날씨, 영수증, 장보기 목록 등등 다양한 일상의 기록들이 지금까지 남아 옛날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한다. 작가는 이집트형 도기를 만든 후 깨서 인위적인 도자 파편들을 만들어 그 위에 다이어리를 써나갔다. 고대 이집트의 항아리들과 함께 유리장 너머로 보이는 런던 대중교통카드Oyster card의 그림이 기묘한 시간의 전복을 선사한다.
도자, 과거와 현재의 다리
주로 영국을 기반으로 한 역사와 문화에 영감을 받아 작업을 이어온 작가 김선애는 현재 한국과 영국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동안 진행했던 작업들은 주로 외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영국과 유럽 문화에 대한 것들이었기에 작가는 귀국 후 거의 일 년간 앞으로의 작품 방향에 대해 깊은 고민의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주로 식문화와 피겨린 등이 연관된 작품들이 주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늘 새로운 작품, 새로운 프로젝트들로 가득하다. 하나의 형식만 파고들기보다는 전체를 통괄하는 철학을 바탕으로 작품을 이어나가고 싶다고 말하는 작가는 긴긴 도자의 역사만큼이나 해보고 싶은 것도 너무 많다. 도자식기들을 이용한 오브제들은 친숙한 이미지를 통해 삶과 밀접한 작품을 만들고 싶었던 작가의 마음을 담은 것이다. 그녀는 작가로서의 일상과 도자기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들을 블로그bakedpottery.tistory.com와 SNS를 통해 풀어내기도 한다. 작업을 위해 깊게 공부하는 만큼 도자기에 대해 품고 있는 이야기도 많다. 언젠가는 꼭 책으로 풀어내고 싶다는 그녀는 교육에도 관심이 많다. 역사와 전통, 그리고 문화를 도자라는 매개를 통해 현재로 끌어오는 작가는 앞으로 도예가로서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싶다는 꿈이 있다. 지금까지의 작품들에서 보여준 집요한 연구와 다양한 시도들에, 앞으로 작가가 활보할 독특하고 재미있는 작품, 프로젝트들이 절로 기대된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6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