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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7월호 | 뉴스단신 ]

조선의 마지막 해태
  • 편집부
  • 등록 2018-01-10 17:43:30
  • 수정 2018-01-10 17:4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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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자기 속 그림, 그림 속 도자기 ①

「백자청화해태호랑이무늬항아리A BLUE AND WHITE PORCELAIN JAR WITH A TIGER AND
MYTHICAL LION」 (HAETAE),
높이 42.5cm
(Christie’s 2016.4.15

 

조선백자 하면 은은한 유백색의 항아리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실용적인 물건에 장식적인 가치를 부가하는’ 공예工藝의 한 분야인 도자는 장식적 성격을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미술이기도 하다. 특히 흰빛의 백자에 푸른색 안료를 더한 청화백자는 조선 전 시기에 걸쳐 귀한 물건으로 취급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왕명에 의해 사용이 금지되었을 정도로 애호되었다. ‘금주법’, ‘금지곡’같은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사용을 금지해야 할 정도였다는 말은 되레 그만큼 많이 만들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여, 현재까지도 조선 후기 청화백자는 비교적 많은 수량이 전세되고 있다.
지난 4월 15일 크리스티 옥션에서 96만5천 달러(한화 약 10억 9천만원)에 낙찰된 「백자청화해태호랑이무늬항아리」는 조선 후기 제작된 청화백자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는 일례이다. 입술 부분이 직립하고 둥글게 내려오는 어깨와 그 아래 좁아드는 동체의 형태가 전형적인 19세기 항아리로, 높이가 42.5cm에 달하는 넓은 항아리의 기면器面을 화폭 삼아 그린 해태와 호랑이의 형태가 안료를 다루는 데 능숙한 화청장畵靑匠의 솜씨를 짐작하게 한다. 해태의 눈썹과 갈기 및 꼬리의 털 묘사, 몸통의 유려한 곡선과 등판을 빽빽하게 장식한 반점을 통해 우리는 19세기에 묘사된 해태의 한 모습을 지금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현재 포털 사이트에서는 과자회사 이름 정도로만 검색되는 단어지만, 해태獬豸는 동아시아에서 꽤 역사가 긴 상상 속의 동물이다. 『산해경山海經』에 의하면 요임금 때의 신양神洋으로, 생김새는 양과 같으나 뿔이 하나 있으며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을 판단하여 알았다고 한다. 기록을 통해 신라 때부터 관직에 해태의 이름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으며1) 고려시대 시정을 논하고 풍속을 교정하며, 백관을 규찰하고 탄핵하는 일을 맡아보던 어사대御史大 등에서 해치관을 썼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2) 조선시대에도 대사헌大司憲이 해치관을 썼다는 기록이 전기부터 등장하며3), 고종대까지도 대사헌이 “교묘한 말로 아첨하는 것을 지적하여 해태가 뿔로 받는 것을 본받아 행한다指便佞而效獬豸之觸”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공명정대함을 행하는 해태에 대한 인식이 지속적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4)

조선의 마지막 해태
한편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는 “고종 임금이 탄 수레가 대궐 밖으로 나갈 때 해태 이내에서는(궐에 해태상이 놓인 경계 이내) 백관이 말을 타지 못하도록 단단히 타일러 경계하라”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5) 이와 같은 경복궁의 해태상이나 왕릉의 신도상 등 당대의 석물을 통해 조선이 추구한 해태의 정확한 예를 확인할 수 있는데, 조선 후기 해태 석물로는 고종이 묻힌 홍릉과 순종이 묻힌 유릉의 해태상이 대표적이다. 다만 홍릉과 유릉의 해태상은 약간 모습이 다른데, 홍릉의 해태상은 사자에 가까운 납작한 얼굴로 조각되었으며 얼굴 주변 및 등과 다리 주변에 갈기가 묘사되었고, 유릉의 해태는 보다 용이나 기린에 가까운 얼굴과 날렵한 몸통으로 표현되었다. 이처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두 석물이 차이를 보이는 것은 동아일보의 석물 관련 기사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유릉의) 모형을 신라 시대의 조선식에 근대 일본식을 가미한 절충식으로 한다고 하였으나 그 후 이와 반대되는 순 일본식으로 하자는 의견이 높아져 드디어 순일본식으로 짐승의 다리를 앙상하게 내어놓고 선線을 일본식으로 가냘프게 하였다는데, 일본식을 주장한 이유로는 근대에 이르러 조선의 예술품은 영 쇠멸하고 말아 이제부터는 다시 신생기新生期라고 할 만한 시기에 이르렀으나 고종제高宗帝의 황릉 앞에 세운 석물이 중국식을 가미한 조선 예쑬의 최후 작품으로 그 졸렬함이 조선 말기의 예쑬적 표현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장래 역사에 좋은 사실史實을 남기기 위하여는 그 시대의 예술작품을 남겨두어 후세에 전하게 하자는 대조로 불과 지척인 유릉과 홍릉에 전연 딴 취미의 석상을 만드는 것이라더라"

 

이를 바탕으로 유추해 보면 『홍릉산릉도감의궤洪陵山陵都監儀軌』 속 해태는 20세기 초까지의 전통적인 조선의 해태 도상을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즉, 얼굴이 납작하고 코가 뭉툭하며 몸통이 두껍고, 화염형으로 말린 갈기와 다리 부근에 휘날리는 승염형의 털을 특징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도자기 속 해태
청화로 시문 된 해태 문양도 있지만, 가장 많이 남아있는 있는 도자기 속 해태 도상은 상형 연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해태 도상의 정형화된 이미지를 간략화하여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납작한 형태가 다수 남아있는데, 둥글고 부리부리한 눈에 살짝 들린 주먹코, 옆으로 길게 다문 입과 웅크린 몸통에 원형의 반점이 장식되어 있는 통도사성보박물관 소장「백자청채해태형연적」이 대표적이다. 유사한 형태의 연적이 여러 점 확인되어 비교적 손쉽게 많은 양을 제작할 수 있는 틀 성형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큰데, 조선 후기 문방청완에 대한 애호로 각종 문방구류가 성행함에 따라 연적류 또한 많이 만들어지면서 유행한 도상 중 하나로 생각된다.
직접 해태의 얼굴과 몸의 형태를 만든 상형 연적의 경우 동일한 형태로 제작된 경우가 거의 확인되지 않으나 대체로 목을 상대적으로 위로 빼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얼굴은 용 또는 사자가 혼재된 모습이며, 몸통은 대체로 사자와 같은 짐승형으로 음각으로 갈기를 묘사하고 청화 안료를 사용하여 채색하였다. 청화로는 이목구비의 표현 외에도 몸통에 반점 등을 그려 넣은 경우나 다리 부분에 영기가 피어오르는 듯한 갈기가 묘사된 경우도 있다. 주로 입과 등에 수구水口가 있는데, 일부는 동화 안료 등을 사용하여 붉게 채색함으로써 장식성을 더했다.
한편 인천광역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백자청화해태형연적」의 등에는 수평으로 둥근 구멍이 뚫려있어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다른 해태형 연적과 비교해보면 보면 등에 기물을 지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되는데, 해태형 연적 중 등에 기물을 지고 있는 경우 대개 호리병인 경우가 많은 것으로 확인된다. 일반적으로 해태형 연적은 좌측 관자놀이 부근과 우측 등에 물을 넣고 따를 수 있는 구멍이 있는데, 호리병이 부착된 경우 등이 아니라 호리병에 구멍을 뚫어 사용하였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7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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