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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월호 | 뉴스단신 ]

일본에서 건너온 꽃무늬花文
  • 편집부
  • 등록 2018-01-09 19:4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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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자기 속 그림, 그림 속 도자기 ⑥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 순서대로)
「백자청화화훼문대접白磁靑畵花卉文大楪」 ‘뎡미가례시순화궁고간대듕쇼삼듁’, 조선
19세기(1847년 추정), 17.2×11.0(h)cm, 국립중앙박물관(1929년 구입,
본관10963)
「백자청화화훼문만력년제명대접白磁靑畵花卉文萬曆年製銘大楪」 조선 19세기, 22.0×12.0(h)cm,
국립중앙박물관(1929년 구입, 본관10947)
「백자청화화훼문대접白磁靑畵花卉文銘大楪」 ‘뎡미가례시순화궁고간대듕쇼삼듁’,
조선 19세기(1847년
추정), 17.8×11.0(h)cm, 국립중앙박물관(1945년 입수, 접수667)
「백자청화화훼문대명대접白磁靑畵花卉文大銘大楪」 조선
19세기, 22.0×12.0(h)cm, 국립중앙박물관(2003년 구입, 구3134)
「백자청화화훼문접시白磁靑畵花卉文銘楪匙」 조선 19세기, 17.8×11.0(h)cm,
국립중앙박물관(1929년 구입, 본관 10624)

 

 

사회경제적 발달을 배경으로 범람하게 된 조선 후기 청화백자의 양적 증가는 사용층의 증가 및 확대를 의미하는 동시에 사번私燔의 증가와 같은 공급 과정의 변화도 내포하고 있다. 이는 자기 자체의 기형器形 및 문양이 다양해지는 변화도 가져왔는데, 수요층의 취향에 맞춰 이국적인 청淸의 화려한 문양이나 길상吉祥적인 의미를 내포한 문양들이 장식된 것이 대표적이다. 그중에서도 기면器面을 여러 칸으로 구획하고 화창과 꺾쇠 무늬를 장식한 청화백자는 회화적인 문양들과 달리 디자인적 요소가 강하게 두드러지는 문양으로, 이전에는 시문된 적이 없어 새롭게 등장한 조선 후기 청화백자 문양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847년 정미년丁未年에 치러진 헌종憲宗과 경빈 김씨慶嬪金氏(1832-1907)의 가례에 사용된 것으로 생각되는 ‘순화궁順和宮’ 점각명 자기의 경우 그 화려함이 조선 후기 청화백자 중에서도 유달리 돋보인다. 그릇의 외면을 구획하고 화창花窓과 절지문折枝文 및 구름형 꺾쇠를 그려 넣었을 뿐 아니라 안쪽까지 구연을 따라 화당초문대花唐草文帶와 빙렬문대氷裂文帶를 장식했고, 안쪽 바닥면에 십자형十字形으로 화당초문花唐草文을 시문하여 무척 공을 들여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헌종이 경빈 김씨와의 혼인을 고집해 효정왕후와의 결혼 뒤 결국 후궁으로 들인 일화는 잘 알려져 있는데, 낙선재와 석복헌을 나란히 지어 경빈 김씨를 기거하게 할 만큼 극진했던 마음이 그릇에도 담긴 듯하다.

한글로 ‘뎡미가례시순화궁고간대듕쇼삼듁’이라고 적힌 그릇은 몇몇 박물관 및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사실이 확인되는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백자청화화훼문대접白磁靑畵花卉文大楪」은 조선총독부박물관 시절 1929년 구입한 것이 확인되어 비교적 출처가 확실한 예라 할 수 있다. 그릇 하단에는 굽을 따라 한글로 ‘뎡미가례시순화궁고간대듕쇼삼듁’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정미년 헌종과의 결혼식嘉禮에 경빈 김씨順和宮 곳간에서 사용하기 위해 대·중·소 크기의 발 삼십 점三竹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점각點刻은 날카로운 도구로 그릇의 표면을 점점이 쪼아 글자를 새긴 것으로, 동일한 글자가 새겨져 있는 예가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사회경제적 발달을 배경으로 범람하게 된 조선 후기 청화백자의 양적 증가는 사용층의 증가 및 확대를 의미하는 동시에 사번私燔의 증가와 같은 공급 과정의 변화도 내포하고 있다. 이는 자기 자체의 기형器形 및 문양이 다양해지는 변화도 가져왔는데, 수요층의 취향에 맞춰 이국적인 청淸의 화려한 문양이나 길상吉祥적인 의미를 내포한 문양들이 장식된 것이 대표적이다. 그중에서도 기면器面을 여러 칸으로 구획하고 화창과 꺾쇠 무늬를 장식한 청화백자는 회화적인 문양들과 달리 디자인적 요소가 강하게 두드러지는 문양으로, 이전에는 시문된 적이 없어 새롭게 등장한 조선 후기 청화백자 문양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847년 정미년丁未年에 치러진 헌종憲宗과 경빈 김씨慶嬪金氏(1832-1907)의 가례에 사용된 것으로 생각되는 ‘순화궁順和宮’ 점각명 자기의 경우 그 화려함이 조선 후기 청화백자 중에서도 유달리 돋보인다. 그릇의 외면을 구획하고 화창花窓과 절지문折枝文 및 구름형 꺾쇠를 그려 넣었을 뿐 아니라 안쪽까지 구연을 따라 화당초문대花唐草文帶와 빙렬문대氷裂文帶를 장식했고, 안쪽 바닥면에 십자형十字形으로 화당초문花唐草文을 시문하여 무척 공을 들여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헌종이 경빈 김씨와의 혼인을 고집해 효정왕후와의 결혼 뒤 결국 후궁으로 들인 일화는 잘 알려져 있는데, 낙선재와 석복헌을 나란히 지어 경빈 김씨를 기거하게 할 만큼 극진했던 마음이 그릇에도 담긴 듯하다.

한글로 ‘뎡미가례시순화궁고간대듕쇼삼듁’이라고 적힌 그릇은 몇몇 박물관 및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사실이 확인되는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백자청화화훼문대접白磁靑畵花卉文大楪」은 조선총독부박물관 시절 1929년 구입한 것이 확인되어 비교적 출처가 확실한 예라 할 수 있다. 그릇 하단에는 굽을 따라 한글로 ‘뎡미가례시순화궁고간대듕쇼삼듁’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정미년 헌종과의 결혼식嘉禮에 경빈 김씨順和宮 곳간에서 사용하기 위해 대·중·소 크기의 발 삼십 점三竹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점각點刻은 날카로운 도구로 그릇의 표면을 점점이 쪼아 글자를 새긴 것으로, 동일한 글자가 새겨져 있는 예가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1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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