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철화매죽문시명호白磁鐵畵梅竹文詩銘壺」 조선 17세기, 35.3(h)cm,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조선 후기 청화백자에 가장 많이 그려진 화훼문이 모란이라면, 조선 전 시기에 걸쳐 가장 많이 그려진 화훼문은 매화가 아닐까 싶다. 조선 전기에 그려진 문양 중 매화문은 단독 문양으로 그려진 비율이 제일 높고, 또 세한삼우歲寒三友로 불리는 송죽매松竹梅 중에서도 매화와 결합된 매죽문梅竹文, 매조문梅鳥文, 매조죽문梅鳥竹文의 시문비율이 절대적으로 높아 특별히 애호되었던 문양으로 생각된다.1) 조선 후기에는 전기에 나타난 조합 외에도 매화문과 당시 유행하던 다른 문양이 결합하거나 보조문양으로 그려지는 등 기면에 널리 장식되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조선 전 시기에 걸쳐 매화를 노래한 시문집과 문인들만 헤아려보아도, 비단 위든 도자기 위든 매화를 그려두고 보고 싶어 했을 그 마음이 짐작이 된다. 조선 전기에는 “매화 말고는 천지간에 다른 꽃 없으니, 나처럼 유별나게 사랑한 이도 많지 않으리除梅天地更無花, 奇愛如予亦不多”라고 스스로 평한 서거정徐居正(1420-1488), 「매병십절梅屛十幅」을 통해 각양각태의 매화그림에 제를 붙이는 등 유달리 많은 제화시題畵詩를 남긴 김안로金安老(1481-1537)가 대표적이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스스로 ‘참으로 매화를 아는 사람眞知梅者’이라 칭하며 무려 72제 107수의 매화시를 지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에 이어, ‘그대의 매화벽은 따를 사람 없으리梅癖應無似爾人’라며 매화 시를 주고받은 안동김씨 가문의 형제 김창협金昌協(1651-1708)과 김창흡金昌翕(1653-1722)이 등장한다. ‘주인옹은 이미 하나의 매화가 되었다오主翁而已一梅花’라고 고백한 자하 신위紫霞 申緯(1769-1845)에 이르면 그 매화 사랑이 가히 치우쳐 벽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전기 매화문梅花文과 매화도梅花圖
옥빛 꽃은 천기天機가 묘하고 玉蘂天機玅
금빛 꽃술은 천제가
점철성김點鐵成金하였네 金鬚帝鐵成
용처럼 서린 둥치는 가로 누워 있고 龍根橫偃蹇
학 같은 줄기는 깡마르게 솟아있네 鶴幹瘦崢
조선 전기의 문신 서거정徐居正(1420-1488)이 남긴 여러 편의 매화시 중에서도 앞의 시는 매화의 각 부분을 비유적으로 표현하여 주목된다. ‘용 같은 둥치’나 ‘학 같은 줄기’와 같은 표현은 중국의 『화광매보華光梅譜』를 비롯한 많은 화보畵譜와 시詩에서 인용되면서 매화의 마르고 옹이진 줄기를 형상화한 가장 특징적인 단어로 사용됐다.4) 조선 전기의 매화도는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국보 219호 「백자청화매죽문호」에 묘사된 매화나무를 통해 그 모습을 짐작해보고자 한다. 기면에는 용 같은 둥치라고 비유한 바와 같이 용틀임하듯 크게 꼬인 굵은 나무 등걸이 기면을 가로지르며 그려졌는데, 구륵법을 사용하여 굵은 줄기를 묘사하고 짙은 명암을 넣어 회화적으로 채색하였다. 굵은 가지에서 뻗어나간 세부 줄기는 학에 비유한 것처럼 깡마르게 뻗은 형태로, 몰골법을 사용하여 선으로 표현하였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3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