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두상은 오래전 작가의 프랑스 유학 시절 중세 고딕 성당을 방문하여 다양한 조상들에 매료되었던 개인적 경험과 감상에서 출발한 것으로 그간 연작들 속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해온 소재다. 인간의 두상은 고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인류의 조각사 전반에서 수없이 재현되고 있을 만큼 입체를 다루는 모든 작가에게 가장 기본적인 소재이자 도전과제이며 여전히 매력적인 대상이다. 그러나 인간의 두상은 하나의 조형적 형상이기 이전에 실존의 표상이다. 얼굴은 다른 신체의 부분들과 달리 현존성과 정체성이 강하게 나타난다. 얼굴은 인간의 몸 부분들 중에서 가장 사회적인 텍스트이며 주체의 내면이 외부로 드러나는 발로이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서 김정범은 수많은 전작들의 부분이었던 두상을 다시 꺼내어 독립적 주제로 응시하고 있다. 오랫동안 자신과 닮은 형상을 흙으로 빚고 뜨거운 불을 쐬어 굳혀 이미지화하는 과정에서 작가에게 두상은 자신의 초상이자 인간의 실존을 강하게 드러내는 표상으로 새롭게 알레고리화 했다. 첫째, 두상의 표피를 입체적 화면으로 재해석하고 둘째, 두상을 새장처럼 열려있되 닫힌 아이러니한 실존의 공간으로 재해석하며 셋째, 다시 옛 도자 속에 존재했던 숱한 타자(여성)들의 얼굴에서 발견하게 되는 우리의 ‘얼굴’에 주목한다.
그들은 모두 세상엔 오직 푸른색만 존재하는 것 마냥 온통 푸르다. 이미지들은 청화靑華를 비롯해 대부분 옛 미술사에 등장했던 수많은 예술품들을 모태로 한다. 주로 중국, 한국, 일본 등을 비롯한 옛 도자기를 장식했던 고전 문양들로부터 델프트, 파이앙스 같은 유럽의 자기와 이슬람의 건축 장식들, 고전 명화들, 그리고 우키요에浮世繪를 비롯한 인쇄 이미지들이다. 모두 오랜 시대와 다양한 매체와 푸른색을 매개로 관계했던 이미지들이다. 본디 구체적 형상에서 모양을 따고 지역과 역사적 배경, 삶의 유형에 따라 고유한 형태로 의미화된 것들이지만 그들은 이제 작가의 의도에 의해 재구성되고 재맥락화한 패스티쉬pastiche들이다.
작가는 예술사 마디마다 푸른색으로 그려진 유명한 명화들 그리고 수많은 공예품의 피부를 덮었을 반복의 패턴들을 손수 정성껏 도陶의 화면으로 옮긴다. 그의 그림은 오랜 세월 체화된 숙련된 완성도와 총체적 조화를 강조하는 전통의 복원 혹은 계승의 일환으로 평가하기엔 다소 부족한 화면이다. 그러나 김정범의 그리기는 근본적으로 ‘잘 그린 그림’을 지향하지 않는다. 그의 청화는 전체를 유기적이고 통합적으로 관계 맺으려는 전통적 화법畫法을 거부한다. 그의 그리기를 지켜보노라면, 옛 그림처럼 순간순간의 판단에 촉각을 곧추세우고 깊은 의식을 거치지 않고 화면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무의식적
意外으로 반응하며 형상을 그리는 그림이 아니다. 오히려 손에 쥔 이미지와 도판 사이를 분주히 오가며 이미지를 따라 그리는 일에 가깝다. 그조차 작가는 수일 동안 애써 그린 이미지를 유약으로 덮고 긁어내고 뭉개어 무위화한다. 이처럼 종당 지워내고 감출 화상畫像을 굳이 오랜 시간 수공으로 공력 들여 그려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4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