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기다림과 채집의 과정
백진은 하얀 흙으로 결을 만든다. 그의 작업은 석고틀에 하얀 흙슬립을 부어 얇은 도판을 만드는 일로 시작된다. 그리고 틀이 흙물의 습기를 머금어 흙이 꾸덕하게 되기를 기다린다. 적당한 때에 작가는 도판 위에 눈을 고정하고 자와 칼을 쥔 손에 똑같은 힘을 주어 최대한 반듯이 그리고 동일한 간격을 유지하며 수직과 수평의 선들을 내리 긋는다. 도판에 결을 일으키는 이 일을 단지 구조의 일부로서 작은 파선들을 마련하려는 기초과정으로 치부하기 쉽다. 하지만 그것은 거대한 화면의 동일함과 동질성을 파편화, 개별화시키는 과정이며 그렇게 만든 세세한 부분들로 다시 거대한 화면을 만들려는 작가의 의도가 구체적으로 발화하고 결정되는 중요한 공정이다.
작가는 자른 결들을 스폰지나 마른 천위에 하나씩 겹치지 않게 눕혀 말린다. 몸 뉘였던 장소를 옮기고 공기 중으로 수분을 날리는 과정에서 흙의 결들은 이리저리 뒤틀리고 접히고 말린다. 일정한 두께, 일정한 크기의 것을 만들려 시작한 일이나 애초에 자연에게 정형화된 무엇을 기대하고 관철시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흙은 자연이다. 젖은 흙을 말리는 주체도 바람이고 열이다. 그들은 인간 의지 바깥에 있고 인간의 노력과 의지와 무관한 독자성과 자율성이 있다. 게다가 액체같은 흙물이 얇고 말랑말랑한 막膜이 되기까지는 절대적 시간과 조건도 필요하다. 그리고 작가가 긴 기다림 끝에 얻는 흙의 상태는 계절과 온도, 날씨, 재료의 상태에 따라 매번 다르다. 이 속에서 작가가 할 일이란 자신이 지난 흙을 만지고 기다려온 수많은 시간 속에서 터득한 흙과 불에 대한 이해를 더듬고 결과를 예측하며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기다리고 노력하는 것이다. 때문에 백진의 작업과정에서 ‘기다림’과 ‘인내’는 매우 중요한 작업태도라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백진의 작업이 수동적이고 순응적인 것만은 아니다. 백진은 액체처럼 흐르고 젖어 있는 흙물이 건조와 번조의 과정을 거쳐 금속처럼 단단한 존재로 거듭나기까지 모든 변화의 과정을 집도하고 목격한다. 그렇게 얻은 결과들을 눈과 손으로 헤집고 채집하여 재구성한다. 다른 도예가들이 초기 성형 단계에서 흙으로 형상을 빚어 자신의 미적감성과 의지를 부여하는데 반해, 백진의 조형의지는 자화된 백색 조각들을 대응시키고 구조로 전치시키는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발휘된다. 작가는 금속처럼 낭창하게 굽은 자화瓷化의 조각을 가지고 화면을 채워간다. 흙 조각 마다 달리 지닌 고유의 매스와 선이 수평으로 몸을 포개면서 융기하거나, 수직 아니면 사선, 직각으로 포개어진다. 단지 조각, 개별 단위에 불과했던 백색의 결들은 평면을 지지 삼아 출렁이듯 융기되고 균열되며 분출되다 다시 수렴한다. 줄음질 치고 때론 얇은 만곡선을 그리면서 공간을 수없이 가른다. 서로의 몸을 포개고 부딪치며 율동을 이룬다. 결이 융기하고 질주할수록 무형은 유형으로 채워지고 부재하고 광활하던 공간은 세밀하고 복잡하게 구획된다. 그 자리에는 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축적의 땅 즉, 균열과 응축을 드러내는 조형적 화면이 태어난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5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