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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6월호 | 뉴스단신 ]

이왕직미술품제작소와 비원자기秘苑磁器
  • 편집부
  • 등록 2018-01-08 14: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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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제작소의 모습」萩森茂 편저, 『京城と仁川』, 大陸情報社, 1929

 

이왕직미술품제작소1)는 대한제국시기 황실의 후원으로 설립되어 경술국치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기까지 약 28년간 운영된 근대 공예문화를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대표적인 공예기관이다. 근대라는 시대적 변혁기 속에서 공예분야가 직면한 상황과 공예에 대한 인식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기관이라 할 수 있다.
미술품제작소가 설립될 당시 대한제국 황실의 위치는 바닥으로 떨어져있었으며 관영수공업체제가 해체되고 개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문제의식에 의해 ‘전통 공예기술의 복원과 계승’이라는 취지를 가지고 황실의 지원을 받아 설립된 미술품제작소는 근대기 공예사 전체로 보았을 때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전통 공예기술의 전승적 기반을 만들고, 나아가 그 전통을 현대 공예에 이르기까지 전하였다고 평가된다.

미술품제작소에 비추어 본 시대의 이야기
외세의 자본력과 기술력이 들어오면서 기존의 수공업체제가 해체됨과 동시에 당시의 공예품은 질적으로 조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환경에서 우리의 고유한 전통 또한 주체적으로 이어나가지 못하였다. 또한 이 무렵의 대한제국 황실은 힘이 없었으며 의도하지 않게 추진된 개화에 대해 간접적인 황실 권위의 회복 의지를 드러낼 필요성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미술품제작소는 ‘조선의 고유한 전통적 공예미술의 진작’을 표방하여 단절 위기에 놓여있던 전통 공예 기술을 이어준다는 취지를 가지고 시대적 상황과 문제의식에 의해 황실의 지원을 받아 설립되었다. 즉, 오랫동안 피폐해있던 조선의 고유한 전통적 공예미술의 발달을 도모하고, 산업화로 인한 쇠락하는 전통공예의 맥을 잇고자 하였다. 나아가 황실의 존엄을 지키고 식민지 시기라는 상황에 맞서 대응하려는 의식을 담고 있다.

미술품제작소는 1908년 10월 ‘한성미술품제작소’로 시작하여 1913년 6월까지 황실의 후원으로 운영되었으며, 그 후 이왕직2) 소관으로 넘어가면서 ‘이왕직미술품제작소’로 명칭이 바뀌게 된다. 1922년 8월에 일본인에게 넘어가 폐쇄되는 1936년까지는 ‘주식회사 조선미술품제작소’로 명칭이 변경되어 주식회사 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명칭의 변화는 단순한 상호변화가 아닌 시대적 상황과 제작소의 성격의 변화에 따른 것이라 할 수있다. 한성미술품제작소가 시작되고 경술국치까지는 다분히 설립목적과 부합하는 전통성이 강한 제작품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로 들어가면서 일본인의 간섭이 이루어지게 됨에 따라 점차 미술품제작소의 운영이나 제작활동에 있어 자율적이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1913년 한성미술품제작소는 경영악화를 이유로 이왕직에서 인수하게 된다. 이때부터 미술품제작소의 제작품은 상업적·사업적 주체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그만큼 제작활동에 있어서 왕실의 입지와 제작의 자율권은 축소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미술품제작소가 일본인 자본가 도미타 기사쿠富田義作에게 매각되면서 공예품의 제작, 판매와 더불어 제작품을 만드는 원료를 연구하여 제조 및 판매하는 등 전반적인 공예분야를 모두 다루었다. 주식회사 체제로 가면서 이득을 남기기 위해 득이 되는 것은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실이 되는 것은 과감히 버리는 체제로 바뀌게 된 것이다. 당시의 제작품들도 관광상품이나 다량으로 제작되었던 기념품 등의 생산이 주를 이루게 된다. 이처럼 미술품제작소는 운영체제의 변화와 함께 일제의 타율적 주도하에 명칭을 비롯하여 조직, 운영 그리고 제작품까지 함께 변화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 기사를 통해 미술품제작소의 도자생산이 1918년부터 시작되었음 유추할 수 있으며, 이왕가에서 이 시기의 산업도자들과 차별화시켜 전통 도자의 복원을 위한 연구를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도자에 대한 신설의지는 이미 한성미술품제작소 시기인 1911년부터 시작되었다. 오가와 쯔루지小川鶴二가 전무취체역3)으로 취임하게 된 후 경영에 관여하게 되자 고려자기의 재흥 계획을 세우게 되고, 1914년 이왕가에서 일본인 스와소잔諏訪蘇山을 촉탁으로 초빙하여 고려도요지를 조사하게 하여 가마窯의 재흥을 의뢰하는 등 도자 재현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또한 여기서 도자가 생산된 窯가 비원의 근처였을 것으로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창경궁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를 뒷받침할만한 근거자료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당시의 도자 제작지가 ‘비원’이였다고 확신하는 것에는 무리가 따른다. 오히려 당시 창덕궁 후원인 비원은 일본 관료들의 최고의 연회 장소였으며 일반 관람객들의 필수 관광코스로 여겨졌던 만큼 그 명칭을 차용해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도미타기사쿠의 삼화고려소 한양고려소 제작품, 서대식소장

 

이렇게 시작된 미술품제작소의 도자제작은 도미타 기사쿠가 인수하는 1922년을 기점으로 점차 줄어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소유하고 있던 재현청자 공장인 삼화고려소와 한양고려소의 제작품이 더 우수하였기에 여러 곳에서 청자를 생산하기보다 기존의 우월한 평가를 받고 있었던 한양고려소에서 청자제작을 집중하는 것이 이익이라 판단하였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 미술품제작소에서는 1918년부터 1922년 사이에 도자를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6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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