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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7월호 | 뉴스단신 ]

유럽에서 시작된 사각병四角甁
  • 편집부
  • 등록 2018-01-04 17:2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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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후기 백자 사각병의 조형 원류와 특징

Esaias van de Velde, 「Elegant company dining in the open air」 1615, Rijksmuseum

 

사회경제가 발달하고 문화예술의 욕구가 높아진 조선후기에는 다종다양한 기형의 백자가 제작됐다. 특히 백자 사각병은 이전에는 볼 수 없는 새로운 기형으로 장방형 동체에 어깨의 모서리를 비스듬히 깎아내고 구연과 굽을 부착한 병을 의미한다. 이러한 백자 사각병의 등장은 동아시아의 국제적인 시류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16세기를 시작으로 한 중국의 유럽 수출용 자기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유럽의 중국자기 열풍과 주문제작
16세기 초 유럽은 포르투갈을 선두로 중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다량의 중국자기를 무역품으로 취급하였다. 물론 중국자기가 유럽에 소개된 것은 오래 전의 일이지만, 대체로 유럽보다 이슬람시장을 겨냥한 도자기의 수량이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점차 중국자기의 상품적, 감상적 가치에 눈을 뜬 왕공·귀족의 폭발적인 증가로 유럽 내 소비가 이슬람 시장을 앞서게 됐다. 유럽 사회 내에서의 사치품 소비 증가와 소유를 통한 지위 과시 경향이라는 두 가지 사회 변화는 중국자기의 유입과 결부돼 고가의 중국자기를 소유하는 것은 소장자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부유함을 보여주는 행위가 됐고, 실제로 귀족들은 개인 컬렉션 공간을 만들어 중국자기를 진열함으로써 자신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과시했다. 유럽인들은 초기에는 중국에서 생산된 자기를 그대로 수입해 사용했으나 점차 도자기 상점에 구비돼 있는 카탈로그나 견본을 참고하여 그들의 기호와 취향에 맞는 자기를 제작해줄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1625년 말레이시아 인근에서 침몰한 완리호Wanli Shipwreck는 포르투갈의 배로 중국 만력연간萬曆年間 경덕진에서 제작된 37,000여 점의 청화백자가 실려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선적된 청화백자 중에는 백자 사각병 편도 포함돼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완리호 출수 사각병 편과 유사한 백자 사각병이 영국박물관에 소장돼 있다는 점이다. 영국박물관 소장의
「백자청화문장문사각병」은 완리호 출수 사각병 편과 마찬가지로 장방형 동체에 상부에는 유럽풍 문양이 그려져 있고 하부에는 전형적인 중국풍의 괴석과 초화문이 시문돼 있다. 동체 상부에 그려진 문양은 확인결과 포르투갈의 빌라스 보아스Vilas Boas 가문의 문장으로 밝혀져 백자 사각병이 유럽의 주문제 수출자기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중국에서 제작돼 유럽으로 수출된 백자 사각병은 물레 성형이 아닌 편평한 판을 만들어 서로 이어붙인 판성형 기법으로 제작됐다. 네 면이 모두 반듯한 장방형 동체에 어깨는 모가 없이 부드럽게 이어지며 원형의 구연이 딸린 형태로, 중국 내에서는 보기 드문 기형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기형은 유럽에서 와인이나 진GIN을 담았던 유리병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네덜란드의 정물화를 비롯한 다양한 판화와 회화 작품 속에 보이는 유리제 사각병은 중국에서 제작된 백자 사각병의 기형과 조형적 특징을 공유하고 있어 이러한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당시 유럽에 퍼진 중국자기의 열풍과 더불어 그들의 생활용기인 유리제 사각병을 모방해 백자 사각병을 제작해줄 것을 주문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백자사각병」 1670-1690, Oosterland 호 출수

 

일본의 사각병 제작과 유럽 수출
유럽 내 중국자기에 대한 끊임없는 수요와 반대로 중국 내에서는 명말청초의 정치적 혼란기를 겪고 있었고 이로 인해 중국자기의 유럽수출은 난항을 겪게 됐다. 이미 유럽 내에서 중국자기에 대한 열망이 팽창될 대로 팽창된 상황에서 당시 수출을 주도하던 동인도회사는 대안을 찾아야만 했고, 17세기 초 자기 제작에 성공한 일본은 적합한 대상이었다. 일본은 모모야마시대桃山時代에 남만무역南蠻貿易을 통해 이미 유럽을 경험한 바 있고 그들의 주문을 받아 공예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교토국립박물관 소장의 16세기 「화조마키에나전사각병 및 상자花鳥蒔絵螺鈿角徳利及櫃」는 이러한 정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남만칠기 사각병은 두 가지 사실을 유추하게 하는데, 첫째로는 사각병이 일본 내에서 자생적으로 제작된 기형이 아닌 유럽의 주문에 의해 만들어진 기형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일본은 이미 칠기로서 사각병을 제작한 경험을 통해 동인도 회사의 백자 사각병 주문을 소화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동인도회사에 의한 공식적인 일본자기의 유럽 수출은 1659년이었다. 당시 나가사키 데지마 상관장Zacharias Wagenaer, 1614~1668의 문서를 통해 1659년 10월 나가사키 항을 출항한 보헬장The Vogelzang호에 이마리 자기가 선적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1697년 남아프리카 연안에서 침몰한 오스터랜드oosterland호에서 실물 백자 사각병이 발견돼 일본에서도 유럽 수출을 위한 백자 사각병이 제작됐음이 확인됐다. 또한 태국 아유타야 왕궁 유적에서도 1670~1680년대 제작으로 추정되는 백자 사각병 편이 5점 이상 출토됐다. 흥미로운 점은 아유타야 출토 편과 유사한 전세품이 네덜란드 국립박물관과 영국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에 소장돼 있어 백자 사각병이 세트로 여러 점 제작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사각병의 조형 특성상 세트로 제작해 상자에 담아 이동할 경우 기물이 넘어지거나 파손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는 장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7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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