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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9월호 | 전시리뷰 ]

설숙영의 도예:관습적 기억과 미래의 추억 사이에서
  • 편집부
  • 등록 2018-01-04 14:3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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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움 속으로...>
  • 2017.9.13~9.19 갤러리 라메르

「행복2」

 

 우리 인간 생활의 중요한 요소인 의·식·주는 나름의 미학을 형성해왔다. 그 중 식생활과 가장 가까운 것이 흙으로 빚어 불에 구운 ‘그릇’이다. 인류는 선사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갖가지 그릇과 함께 생활해 왔다. 물론 넓게 보면 벽돌, 기와, 타일, 제기 및 장식대 등도 그릇에 포함되지만, 그 중에서도 식생활과 관련된 물 항아리, 씨 항아리, 물병이나 주전자, 냄비, 사발, 완, 접시 따위가 그 중심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도예에 대한 고전적인 정의는 1991년 발간된 『공예개론』의 ‘2절 도자기 공예’에서 미술평론가 이경성이 다음과 같이 쓴 것을 참조할 수 있다. “요업은 흙이나 돌가루 등을 원료로 하여 이것을 번조해서 기물을 만드는 도자기 외에도 초자, 칠보, 시멘트 벽돌, 기와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중 주요한 것은 도자기이다. 도자기 공예는 가마의 구조, 태토, 유약, 화도, 도공의 기술, 구이로 인한 화염의 성질의 변화에 의해 신비하게 차이를 달리하여 생산되는데, 여기에는 인간의 창의를 기초로 하며, 자연의 법칙을 기반으로 하는 그야말로 불 속에서 생겨나는 예술인 것이다”

 

 공예와 예술 그리고 미학이 접속하는 자리에 설숙영의 도예 작업이 위치하고 있다. 동양화에서 출발하여 도자기 속에서 전통과 동시대를 접속시키는 방식은 일종의 회고적인 성격을 지니면서도 일상의 미학을 실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으로서 전통은 추억 속에서 현전한다. 이것은 예술사와 개인사에서 공존하는 방식이다. 오히려 개인의 회고를 통한 시간의 현재화는 물질적 사유를 환기시킨다. 거기에 다양한 도예 작업이 등장한다.

「기다림2」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하여 제라르 즈네트가 말한 바는 설숙영의 도예 작업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본질을 드러내는 것을 지향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계속해서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놓쳐버린 진리, 즉 소유권의 박탈로부터 비로소 작품으로서의 가능성과 진정한 소유권이 생겨난다. 프루스트의 글쓰기처럼 그의 작품도 일종의 팰림프세스트Palimpsest, 다른 텍스트를 써넣을 자리를 마련하려고 적힌 글의 일부나 전부를 지운 양피지이다. 그 안에는 다양한 비유법들과 의미들이 혼합되고 서로 얽혀 있으며, 이들이 모두 동시적으로 현존하고 있어, 오로지 풀어낼 수 없는 전체성 안에서만 해독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시간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역사의 흐름을 바라볼 때와 같은 방식으로 시간의 흐름 밖에 있을 수 없다. 역사 속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도예사 속의 도예가라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강에 비유하자면 우리는 아무리 멀리까지 내다봐도 강 이외에는 보이지 않는 광대한 강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역사를 역사로서 지켜볼 수 있는 일정한 장소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이때 사람은 ‘시간’의 한복판에 있으면서 ‘시간’이 움직인다는 것을 어떻게 알까? 아마도 기억과 추억의 관계가 그것을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기억으로 자기의 정체성을 구축하려한다. 이렇게 이루어진 자아는 순수한 추억일 수는 없다. 그들의 모습은 항상 긴장을 유발하는 파워 게임이다. 추억이 기억을 변형시키기도 하고 기억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추억이 환기되는 경우도 있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9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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