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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9월호 | 전시리뷰 ]

산업도자기에 담긴 부산의 역사
  • 편집부
  • 등록 2018-01-04 14:2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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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릇으로 보는 부산의 근현대>
  • 2017.7.4~8.20 부산근대역사관

산수문 찻잔과 접시, 20세기, 30×21.2×3(h)cm접시(大) 외, 일본경질도기주식회사수출용 접시, 부산박물관

 

 

 일반적으로 전통 도자기의 영역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조선 후기의 청화백자까지다. 그리고 현대 도자기는 미술·공예 개념에서 작가의 작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전통과 현대 사이, 공인들에 의해 납품된 수공업 제품과 현대적인 예술 작품 사이에서 ‘20세기’ ‘산업’ 도자기는 비가시화 되어왔다. 최근 근대 도자기를 조명하는 전시가 하나 둘 반가운 소식을 전해온 가운데, 부산근대역사관이 본격적으로 19세기 분원의 민영화 이후부터 광복 이후 대한도기 주식회사의 설립과 운영까지 아우르는 전시를 열었다.

 

 <그릇으로 보는 부산의 근현대>라는 전시 제목은 ‘그릇’과 ‘부산’, ‘근현대’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구성되어 있다. 굳이 도자기라는 익숙한 이름이 아니라 그릇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이번에 전시된 유물이 전시 초입의 일부 조선백자를 제외하고는 기계로 찍어낸 산업도자기 제품에 해당하기 때문일 것이다. 전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업도자기 회사였던 ‘일본경질도기주식회사이하 일경도기’의 제품을 중심으로 부산의 근현대사를 들여다보려는 의도를 담고 기획됐다

 

분원의 민영화와 외국자기 유입

 조선 왕실이 사용하는 백자를 독점적으로 공급해온 분원의 관영수공업 시스템이 무너지게 된 원인에는 대내외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먼저 국내에서는 왕실의 재정 악화와 분원의 사번私燔에 대한 허가를 들 수 있는데, 주문자인 왕실이 제때 돈을 지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소속 사기장들은 민간에 대한 생산 및 판매를 늘려갔다. 19세기 상품경제의 발달과 수요층의 확대는 다양한 기종과 문양의 생산으로 이어졌으며, 전시된 양념소호나 수복자문이 장식된 사발 등은 이 같은 맥락에서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일본 산업도자기로 대표되는 저렴하고 질 좋은 외국산 자기가 국내 시장을 장악하면서 분원의 몰락은 가속화됐다. 조선인의 취향에 맞게 기벽이 두껍게 제작된 수복자문 백자 사발, 요강이나 저장용기 단지로 사용된 모란문 백자 항아리 등이 현재도 다수 전세되고 있으며 근대 층위에서도 가장 흔하게 발견된다. 17세기 자기 제작을 시작한 일본 도자기 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18세기 중반에 이르면 히젠 지역과 쓰시마에서 제작된 도자기가 정식 교역품으로 국내에 수입되고 있었다

백자‘공출보국’명사발, 20세기, 14.9×8.6(h)cm, 개인이명우

 

일제강점기 부산지역의 산업도자
 일제강점기 일본은 식민지 경제정책에 따라 조선의 원료와 노동력을 이용해 산업도자기를 생산하고자 했고, 1917년 일본경질도기주식회사가 부산 영도에 조선경질도기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20년에는 두 회사를 하나로 합쳐 새로운 일본경질도기주식회사이하 일경도기를 설립했으며, 1925년 부산의 자본가인 카이시 겐타로香椎源太郎를 사장으로 영입하고 부산으로 본사를 이전했다. 일경도기는 조선용으로는 장식이 없는 무문백자를 대량으로 생산했으며, 수출용으로는 산수문이 그려진 청화백자로 대표되는 고급 자기를 유럽·동남아시아·아메리카 등지로 수출했다.

 

 조선총독부의 적극적 유치 노력과 수출에 용이한 부산의 지리적 조건을 바탕으로 영도에 건립된 일경도기는 1930년대 경기 활황 속에서 일본의 가나자와 공장을 압도할 정도로 식민지 조선의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전시경제체제에 들어서면서, 일경도기 또한 한반도의 유기제품과 놋그릇 공출에 따라 대체품을 제작하게 됐다. 또한 만주와 동남아시아 일대 침략 전쟁에 복무했던 군인들에게 지급하기 위한 군용도자기와 전역기념품 등 전시체제와 관련된 도자기들도 다양하게 제작했다.

 

광복이후 대한도기주식회사
 해방이후 부산 영도에 건립 운영된 대한도기주식회사이하 대한도기는 조선경질도기주식회사를 전신으로 하는데, 해방 후 일경도기를 적산 敵産관리대상으로 운영하는 과정에서 대한경질도자기주식회사-대한도기주식회사-대한도자기주식회사로 개칭되었다. 대한도기는 일본식 원형요 사용, 근대적 성형방식, 일본 전사기술 전수 등 일경도기의 생산시스템과 기술력을 상당부분 수용했으며 핸드페인팅·필화기법·인장기법 등 다양한 기법을 사용해 자기를 제작했다.

 

이 중 특기할만한 것은 핸드페인팅으로 생산된 자기들인데, 한국전쟁 당시 피란지라는 특수한 환경으로 인해 화가들의 필체가 반영된 독특한 자기가 일정기간 만들어졌다. 6·25 당시 전란을 피해 부산으로 온 화가들 중에는 생활고 등으로 대한도기에 적을 두고 그림을 그린 화가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접시들은 자기가 아니라 도기에 해당하는데, 당시 사용되던 안료가 섭씨 1,300℃ 이상에서는 타서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1,100℃ 이하에서 번조했기 때문이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9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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