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동파에게 어느 날 묵죽화를 그려달라고 의뢰해온 사람이 있었다. 그 부탁에 따라 그림을 그리려고 하였으나 공교롭게도 먹이 떨어져서 부득이 마침 옆에 있던 붉은 먹을 사용해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자 그림을 부탁했던 사람이 의아스러운 얼굴상을 하고서 “이 세상에 붉은 대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동파는 그 자리에서 답하기를 “그러면 이 세상에 검은 대는 있는가”라고 하니 손님은 아무 말도 못하고 붉은 대나무그림을 그대로 받아 돌아갔다.
도자로 만든 천 여개의 관管으로 구축된 거대한 대나무 숲. 열 지어 선 붉기도 하고 검기도 한 대나무는 낯설면서도 익숙하다. 현대화 된 도시에서도 대나무는 제법 익숙한 식물이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입구로 이어지는 길이나 부산 F1963에 들어서면 마주하는 소리길에도 심겨져 있고, 한식당이나 찜질방 입구 등 ‘한국적’ 또는 ‘동양풍’으로 꾸며놓은 장소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승희는 ‘실내’에서 ‘도자’라는 소재에 다른 색을 입힌 대나무를 선보임으로써 익숙함을 반전한다. 소동파의 말처럼 이 세상에 없는 주죽朱竹과 묵죽墨竹이다.
작년 대청호미술관에서 한국적 취향에 맞춰 하얀 대나무 숲 뒤로 화첩을 걸어놓음으로써 회화와 도자, 고사故事와 현재의 경계를 흐트러뜨렸던 이승희는 9월 9일부터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경덕진景德鎭; 백자에 탐닉하다>에서 다시금 동양적인 붉고 검은 대나무의 숲으로 관객들을 안내한다. 아울러 박여숙화랑 제주에서 9월 9일부터 <TAO: 이것은 도자기가 아니다>, 박여숙화랑 서울에서 9월 12일부터 <TAO: Between Dimensions>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열어 바쁜 개막식 일정을 소화한 이승희 도예가를 부산과 청주를 거쳐 서울에서 다시 만났다.
아우라Aura, 해독되지 않음
이승희의 대표적인 작품은 부조 형식의 백자에 조선시대 도자기를 그린 ‘평면도자 회화’이다. 그는 부조 형태의 표현을 위해 흙물을 70여 겹으로 바르고 건조하여 쌓아올린 뒤, 도자기의 형태를 일정한 비율로 조각하고 다듬는다. 그 위에 놀랍도록 섬세하고 정확한 문양을 청화 또는 철화로 그려 넣는다. 백자호白磁壺나 합盒에 묻어있는 땟물이나 연적 다리의 볼록한 양감까지 재현되어 어느 박물관에 소장된 어떤 작품인지 한 눈에 알아볼 정도이다. “익숙한 도자기의 표면인데 사람들로 하여금 만져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 것 같다”고 작가는 말했다.
고착화된 이미지를 탈피하다
「TAO」는 평면의 흰 도판을 만들 수 있는 경덕진 흙의 특징에 회화성이 가미되어 탄생하게 된 작품이다. 무엇을 그릴 수 있을까, 라는 고민에서 시작된 경덕진에서의 작업은 회화를 베이스로 한 지속적 실험으로 이어졌다. 온도, 재료에 대한 테스트를 위해서도 매일 그림을 그렸다. 경덕진에서는 스스로 불을 때지 않기 때문에 디테일 연구가 쉽지 않다. 그는 현재 경덕진에 2곳의 작업실을 운영하고 있는데, 첫 번째 작업실은 샘플을 테스트하기 위한 장소이며 두 번째 작업실은 순수하게 작업만 하는 곳으로 사용하고 있다.
「TAO17031502」, 2017, ceramic, 45.3×81.6cm
도예와 회화의 이중언어bilingualism
이미지만 놓고 보면 그의 작품은 전통에 기반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한국적인 작업을 하기 위해 백자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백자를 차용하는 방식은 지극히 개인적인 지점으로 백자는 그때의 감정이나 느낌을 담아내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이때 백자는 개별적인 백자 하나하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백자라고 하는 개념 속에서 마치 그림물감을 고르듯 색이나 이미지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승희는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도예의 언어로 질감, 물성 등을 분석해서 현대 회화의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다.
달항아리를 중심으로 조선백자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소비되는 지금, 그의 작품이 주목되는 데는 백자를 평면에 ‘흙으로’ 구현해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백자를 그린 사람도 많고 영향을 받은 사람도 많지만, 현대미술 쪽에서 나만큼 백자에 대해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이미지로서의 접근과는 다르게, 만져보고 불을 때보면서 재료적 물성을 더 많이 경험했는데 이게 곧 저의 특성일 수 있잖아요.” 그럼으로써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고 말한 이승희는 「TAO」를 두고 ‘가장 나다운 작품’이라고 평했다.
나쓰메소세키가 영어의 ‘I love you’를 일본어로 ‘달이 아름답네요月が綺麗ですね’로 번역한 것처럼 다른 나라, 다른 시대, 다른 장르에서는 다른 언어가 필요하다. 회화와 도예는 조형예술로서 현대미술이라는 틀로 함께 묶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서로 다른 언어를 구사하며 평행선을 그려왔다. 이승희는 시각예술에서 개념을 탐구하는 방식을 도예의 언어로, 도예에서 재료와 물성을 실험하는 방식을 회화의 언어로 풀어내며 보다 직접적으로 둘 사이를 중재한다.
공예가 수없이 되뇌고 있는 ‘신체성’을 그는 70여 회의 붓질과 다듬고 파낸 도판의 흔적을 통해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입체를 평면으로 옮기며 끊임없이 새로운 개념을 탐구하는 그는 익숙한 도예를 낯설게 하고 다시 보게 한다. 한국에서, 중국에서, 유럽에서 매번 새롭게 관계를 탐구해온 그는 인터뷰를 통해 내년 교토에서 이조박물관과 함께 새로운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어떤 목소리로 새로운 백자를 들려줄지 기대되는 지점이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10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