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부도에서 만난 옹기, ‘한미요 배씨토가’
배요섭 옹기장의 윗세대부터 전해내려온 옹기 제작 도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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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늦여름에 찾은 제부도의 바람에는 아직 여름의 온기가 맴돌고 있었다. 뜨뜨미지근하게 굴었던 여름이 아쉬웠던 탓에 바다를 머금은 끈적이는 ‘여름 공기’가 싫지만은 않았다. 차를 타고 취재를 다니다보면 문득 도시에서 벗어났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이 있다. 직선으로 쭉 뻗은 도로대신, 멀미가 날 수도 있는 구불구불한 도로를 만났을 때가 그런 순간 중 하나. 제부도로 향하는 동안 그런 길을 만나니 무언가에서 벗어난 듯 마음이 들떴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기운을 내뿜는 가을이 되니 되려 온기가 채 가시지 않았던 제부도 그들의 작업장이 생각난다.
푸레도기
옹기는 익숙한데, 푸레도기라는 단어는 생소하기도 하다. 한미요 배씨토가에서 5대째 이어오고 있는 ‘푸레도기’란 무엇일까. 푸레도기는 ‘옛 왕실에서 저장, 발효 용기로 사용하던 도기’로, “푸레”라는 말은 “푸르스름하다”의 순 우리말이다. 푸레도기는 옹기, 오지, 반오지, 질그릇과 같은 방법으로 만들어지지만 푸레도기는 번조 방법에서 다른 도기들보다 발전된 기법을 사용한다. 숙성된 점토를 사용하고 성형해, 유약이나 잿물을 전혀 사용하지 않으며 장작가마에 구울 때 질그릇과 같이 그을음을 먹여 진회색이 되게 한다. 가마 안의 온도가 상승해 융용될 즈음 가마 안에 소금을 뿌려 기물에 유막을 형성한다. 소금을 뿌려서 얻는 효과로는 반투명하고 윤택 나는 표면이다. 특히 푸레도기는 방부성, 통기성, 저장성이 좋아 왕실에서 사용된 고급 그릇이다. 한미요 배씨토가에서는 여기에 분장기법을 더해 그들만의 검은 푸레도기를 완성해 낸다.
배연식, 배은경, 배새롬의 작업실
한미요 배씨토가의 다양한 ‘검은 푸레도기’ 작품들
제부도에서
바다 한 번 보지 않고 보내버리는 여름은 팥 없는 찐빵이다. ‘바다’라는 단어만 들어도 속이 뻥 뚫리고 마음이 탁 트인다. 누군가에겐 마음의 휴식과도 같은 바닷가를 벗삼아 작업하는 이들이 있다. 한미요 배씨토가의 배연식, 배은경, 배새롬.
배요섭 옹기장, 배연식 기능전승자, 배은경·배새롬 5대에 걸쳐 옹기작업을 하고 있는 한미요배씨토가는 ‘한국의 아름다운 가마를 운영하는 배씨 흙집’이라는 의미 담고있다. 전통방식을 고집하며 푸레도기를 제작하고 있는데, 일반 옹기보다 기능이 훨씬 뛰어난 만큼 제작 방법도 까다롭고 번조도 쉽지 않다. 그런데 이들은 그 중에서도 유독 까다로운 ‘검은 푸레도기’를 선택했다.
“저희도 처음부터 검은 푸레도기만 제작 했던 것은 아니에요. 옹기, 붉은 푸레도기, 검은 푸레도기 등 옹기와 관련된 수많은 작업들을 했었죠.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이 옹기들의 기능을 테스트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그 검사를 통해 검은 푸레도기가 가장 높은 기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결과를 알게 됐어요. 그 후부터는 ‘검은 푸레도기’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어요. 더 좋은 것을 최상의 상태로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검은 푸레도기’를 선택하고, 거기에 집중하고 있어요.”
처음부터 제부도에서 작업했던 것도 아니다.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작업을 하던 그들은 겨울에는 너무 추워 흙이 얼기도 하고, 옹기를 만들기엔 환경이 맞지 않는 것 같아 제부도 행을 결정했다. 제부도는 바람도 잘 불고 일조량도 많고 겨울에도 많이 춥지 않기 때문에 푸레도기 제작 환경에 훨씬 적합하다고 한다. 널찍한 작업장을 면밀히 살펴보니 진정 전통방식 그대로를 고수하고 있었다. 더 많은 생산을 할 수 있는 그 흔한 가스가마도 하나 없다. 10년마다 한 번씩 장작가마를 부수고 짓고를 반복한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걸로 봐서 올바르게 옹기를 빚으려는 그들의 노력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 했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것
몇해전부터 웰빙 바람이 불면서 ‘옹기’시장도 그 수요를 채우느라 움직임이 바빠졌다. 증가한 수요에 우후죽순 늘어난 옹기 제품들 속에서 소비자들이 ‘제대로 숨 쉬는 옹기’를 찾는 일은 거의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다. 잘못 제작된 옹기는 표면에 곰팡이가 나기도 하고, 숨을 쉬지 않아 장독 안에서 장들이 상하기도 한다. 돌고 돌아 이 곳을 찾은 구매자들을 위해 한미요 배씨토가에서는 그들의 작업장을 투명하게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어떤 흙과 소금을 사용하고, 어떻게 작품을 번조하는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거리낌 없이 모두 밝힌다. 이런 과정을 통해 검은 푸레도기의 가치를 제대로 알리고, 소비자들에게 정확한 옹기에 대한 지식을 전달한다.
그들이 낱낱이 밝힌 제작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니 웬만해선 엄두도 못 낼 작업들이다. 우선 흙. 전국 각지를 다니며 직접 채취한 흙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배합해 고무통에 넣어 적어도 3년이라는 긴 숙성의 시간을 갖는데, 컴컴한 고무통 안에서 힘이 없던 흙에 점도가 생기고 미생물이 자라면서 질 좋은 흙을 배출시킨다. 아무리 크기가 작은 작품도 3년이란 세월이 걸리는 것이다. 다음은 소금. 땅끝 마을 해남에서 가져온 천일염을 사용하고 있다. 장작가마 안에서 기물 위에 켜켜이 쌓인 재에 뿌리는 소금은 어느 요소보다도 중요하다. 소금에 좋지 않은 성분이 들어가 있으면 작품 표면에 고스란히 붙어 나오기 때문에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하는 안일함은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소금도 흙처럼 인고의 시간을 거듭해 탄생한 깨끗하고 정직한 국내산 천일염만을 사용하고 있다. 그 뿐인가. 장작가마에 넣는 목재마저 아무거나 쓸 수 없다. 기물 위에 앉는 재가 곧 유약이기 때문에 재료비가 더 들더라도 신중하게 골라 질 좋은 목재만을 사용한다. 모든 제작과정을 마치고 또 다른 시작인 장작가마 불때기. 5일에 걸쳐 진행되는 장작가마의 일정은 무자비하기까지 하다. 5일 사이 장작가마 안의 온도는 1300도 이상까지 오르며 기물을 견고하고 굳건하게 만든다. 높은 온도로 오랫동안 불을 때니 열이 쉽사리 식지 않아 불을 때고 15일 후에야 가마를 열 수 있다. 그래서 일년동안 불을 때는 횟수가 평균적으로 10번에서 많아야 11번이다. 아무리 꼼꼼히 살피며 가마불을 잘 다룬다고 해도 가마 안에서는 불량이 생겨 모든 작품을 온전히 선보일 수 없기에, 작업할 때 어느 과정 하나도 허투루 하는 법 없이 더욱 섬세한 노력을 기울인다. 길고 긴 인고의 시간 끝에 탄생하는 검은 푸레도기의 제작과정은 듣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쏙 빠질 만큼 험난하다. 이런 각고의 노력은 그들이 단순히 누군가에게 판매하기 위한 작품이 아닌 ‘푸레도기’라는 전통을 빚어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유약을 흐르는 것을 방지하는 도지마
그들의 장작가마
전통을 잇는 일
과거에는 집안의 가업을 이어가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언젠가 부터는 가업을 잇는 일이 고리타분하게 인식되면서 차츰차츰 전통가업을 이어가는 집안이 사라져 가고 있다. 그래서 요즘엔 젊은 사람들이 전통가업을 이어가는 것이 대단하면서도 고맙게 느껴진다. 아버지 배연식의 뒤에서 묵묵히 한미요 배씨토가를 이어가고 있는 배은경, 배새롬은 어떻게 가업을 이어가게 되었을까. “뱃 속에서부터 봐와서 그런지, 저희 자매는 자연스럽게, 또 당연하게 이 일을 하게 됐어요. 벌써 공식 경력이 12년이나 됐으니 꽤 오래됐죠. 한때는 대학을 다니면서 갈팡질팡하는 시기가 있기도 했지만, 푸레도기에 대한 길이 확실히 보였기 때문에 이쪽으로 진로를 결정했죠. 가끔은 너무 힘들기도 해요. 여자로서 포기한 것들도 많고요. 손톱을 예쁘게 가꾸지도 못하고, 뜨거운 가마에 들어가느라 윤기 나는 머리카락도 포기한지 오래에요. 그렇게 힘들게 작업하면서도 가마에서 잘 나온 작품을 보면 힘든 것도 다 잊고 또 다른 작업을 생각하죠. 그래도 아직 아버지를 따라가기엔 한참 멀었어요.” ‘이제 작업 방식이 좀 익숙해지고, 알만하다’ 싶으면 아버지 배연식은 더욱 어려운 작업을 새롭게 시도한다. 장작가마 온도를 더 올린다던가, 번조하는 기간을 더 늘린다던가.
꼭 그렇게 전통방식을 따라서 힘든 여정을 거치는 이유가 무엇인지 배연식에게 물었다. “우리문화와 전통은 있을 때 지켜야 됩니다. 잠시라도 손을 놓으면 다시 원상복귀를 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요. 한다고 해도 그 전과 같지는 않을겁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때 꾸준히 연장을 시켜줘야 해요. 손을 놓으면 그 순간 끝이 난다는 생각으로.” 늘 가업을 잇는 자녀들에게 인이 박히도록 하는 이야기다. 그들은 지금도 제부도에서 열심히 작업하고 있을 것이다. 검은 푸레도기가 탄생되는 순간까지의 여정과 닮아있는 한미요 배씨토가, 그 옹기가족의 열정을 응원하고 싶다.
오은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