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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선구
아이러니를 빚어 해학을 굽다
정수경 미학/미술이론가
정수리에 뿔이 솟은 도깨비, 뾰족한 이빨들을 한껏 드러낸 거대한 물고기, 물고기에 올라탄 원숭이, 대머리 얼굴을 지닌 새, 송곳니를 드러내고 활짝 웃고 있는 커다란 호랑이 얼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위로 치켜든 큰 손, 모로 누운 얼굴 없는 몸뚱이. 뿔난 정수리로부터 흘러내린 갈색 물감은 눈썹을 지나 콧잔등까지 흘러내리고, 입술의 붉은 물감은 마치 입술이 터지기라도 한 양 턱으로 흘러내린다. 분청사기의 청색, 고려청자의 옥빛, 선연한 적색과 짙은 갈색, 살색, 흙색, 수많은 색줄기들이 위에서 아래로 어지러이 흘러내린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Where We Going?」(2013)의 인상은 한 마디로 ´정말 복잡하다.´ 그의 작품들이 ‘혼돈’이라는 키워드로 설명되는 것이 전혀 놀랍지 않을 만큼.
이러한 복잡한 모양새는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만의 특징이 아니다. 여선구 작가의 세라믹 조각들은 하나 같이 그러하다. 한 눈에 파악하는 것은 언감생심. 작게는 50cm, 크게는 3m 높이에 달하는 크고 작은 작품들은 어디에서 시작하건 한 바퀴를 빙글 돌며 찬찬히 보아야 하는 사방조형물들이다. 하나의 작품을 구성하는 다양한 형상들은 많은 경우 제각기 다른 연원을 지닌 듯, 그것들이 왜 한데 어우러져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들의 형태는 때로는 기괴하게, 때로는 해학적으로 변형되어 있으며, 그 크기 역시 특정부위를 거대하게 과장하거나 반대로 간략하게 축소함으로써 주관적으로 변화되어 있다. 세부의 묘사 역시 일정한 통일성 없이 아주 세밀하게 표현된 부분과 간단히 추상해버린 부분들이 공존한다. 유약을 이용한 색채는 표현주의적 경향이 농후한데, 아주 자주 기괴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불규칙한 흘리기로 되어있다. 이러한 이질적이고 혼성적인 구성요소들이 마치 한 몸이라도 되는 양 서로 촘촘하게 이어져 하나의 작품을 이룬다. 기묘한 스펙터클. 조금은 오싹하고, 그리하여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지는 시각적 장관이다.
여선구의 세라믹 조각들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것들이 이러한 혼돈 속에서 산산이 흩어지지 않고, 그렇다고 통일된 이야기로 수렴되지도 않으면서, 종국에는 보는 이에게 오롯한 하나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그 오롯한 하나는 무엇일까. 인생에 대한 그의 오롯한 하나의 관점 아닐까? 이러한 관점이 수많은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며 유지되는 덕분에, 전시장을 한 바퀴 돌고 나올 때 즈음이면 보는 이의 마음에 수많은 작품 이미지 위로 그 오롯한 하나가 선연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인생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의 핵을 ‘혼돈’으로 규정하고 싶지는 않다. 대신 ‘혼재’confused existence라고 부르면 어떨까.
혼재의 인생관은 그의 작품들의 형식과 내용, 그리고 작업 절차 모두에서 전면적으로, 일관되게 드러난다. 작품들을 관통하는 하위 키워드들로 변형과 다층성을 꼽을 수 있다.
형상의 차원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그가 작품에 끌어들이는 형상들은 다양하다. 여선구는 한국 민속화의 해학에 깊은 공감을 표명하는데, 그것을 반영하듯 그의 작품에는 민화에서 볼 수 있는 호랑이, 새, 원숭이 등의 동물 형상들과 도깨비 형상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이 형상들은 그의 일상에서 비롯된 다양한 인물, 동식물, 자동차, 종교적 성상들과 혼재되어 등장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한 혼재성은 작가가 작품의 형상들을 주로 서로 다른 복수의 드로잉들에서 가져오면서 생겨난다.
작가는 소조 작업을 하기 전 수많은 드로잉을 통해 작품을 구상하는데, 이 드로잉 단계에서부터 형상들의 혼재가 눈에 띈다. 여백이 없이 빽빽하게 화면에 들어찬 형상들은 어느 하나 주연, 조연으로 나뉨 없이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 자체로도 하나의 독립적인 작품이 되는 이런 드로잉을 들여다보면 어느덧 작가의 마음속에서 2차원 형상들이 3차원 형상들로 떠오른다고 하는데, 이러한 변환의 과정에서 의미 있는 변형이 일어난다. 애초에 심상이라는 것 자체가 주관화를 피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여선구의 심상은 단순한 지각적 차원에서 주관화된 심상이 아니라 심리적 차원에서 주관화된 심상의 성격을 띠며, 그리하여 그의 심리를 반영하는 일종의 내면 투사, 작가의 내면적 자화상과도 같은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성격을 얻게 된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도깨비는 작가를 닮은 대표적 형상이다. 엉뚱하고 종잡을 수 없고 장난기 가득한 도깨비가 겉보기에 수줍어 보이는 그의 내면을 투영하는 모양이다.
「가족모임Family Union」, 69×46×41cm, porcelain, glazed 2007
그런데 이 심리적 변형의 양상이 때로는 심상치 않다. 그의 형상들의 이목구비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눈인데, 이 옆으로 과도하게 찢어진, 서양인들이 동양인의 눈을 묘사하는 전형을 보여주는 듯한 눈매는 무심한 듯 하면서도 보는 이를 어쩐지 불안하게 만드는 섬뜩하고 공격적인 면모를 지닌다. 공격성, 혹은 폭력의 인상은 그의 작품에서 종종 등장하는 칼, 그리고 정말로 자주 눈에 띄는, 피처럼 흘러내리는 붉은 유약에 의해 강화된다. 헌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형상들 곁에 그러한 느낌과 전혀 무관하거나 아니면 정반대의 느낌을 주는 동물 혹은 사물의 형상이 병치된다. 특히 한국민화에서 모티프를 따온 호랑이는 가장 순박한 눈매를 하고 그 어떤 공격성도 드러내지 않은 채 해맑게 웃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변형과 이질적 병치는 개별 대상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흔들며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고정관념의 파괴는 어쩌면 한국에서 태어나 반생을 보낸 뒤 미국으로 이주하여 또 다시 반생을 보내고 있는 작가의 문화적 정체성 혼란에서 배태된 것일지도 모른다. 상투를 튼 동양남성의 얼굴과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 흔히 보이는 서양남성의 얼굴 가면이 야누스와도 같이 하나로 합쳐진 형상인 「가면을 가진 남자」(2009)는 그러한 혼란과 혼성성의 흔적이 아닐까? 이러한 의미의 혼성성, 다중성이 작품의 다층적인 의미 구조를 형성한다.
나아가 이질적이고 다층적 의미의 형상들은 하단부에서 상단부 방향으로 차근차근 쌓여가며 ‘성장’해간다. 여선구의 작품들에 자주 등장하는 선인장 같기도 한 추상적인 덩어리가 이러한 성장의 느낌을 더욱 배가시킨다. 그런데 이 쌓아짐, 증강은 한편으로 꿈의 이미지,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삶의 양상과 닮아 있다. 꿈에서는 아무 상관도 없는 대상들이 아무 맥락도 없이, 혹은 아주 엉뚱한 맥락으로 여기저기서 튀어나온다. 그렇지만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런 대상들도 괜히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무의식 깊은 곳에 억눌려 있던 충동과 본능들이 변장을 하고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변장의 원리를 프로이트는 전치와 압축으로 설명했는데, 이는 여선구의 작품에서 보이는 변형 및 병치의 원리와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분명 심리적 기제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여선구의 형상들은 꿈의 이미지처럼 일정하게 초현실적이면서도 생생한, 기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에덴의 가을Athens Fall」, 406×142×114cm, stoneware, glazed 2012
그래서일까. 통념적인 차원에서 ‘아름답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여선구의 작품들에는 기묘한 매력, ‘치명적 매혹’이 있다.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자캉은 이러한 불가해한 매혹의 근원을 ‘알 수 없음’에서 찾는다. 그러나 이때의 ‘알 수 없음’은 애초부터 알지 못하는 근원적 무지가 아니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알아볼 수 있는 어떤 대상이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면모로 다가올 때 그 알 수 없음이 보는 이의 눈을 뗄 수 없게 만들고 매혹하는 미끼가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알고 있던 친숙한 것이 알 수 없는 낯선 것으로 변환된 상태를 프로이트는 ‘운하임리히’라고 불렀다. 흔히 ‘언캐니’로 불리는 이 무/지의 상태는 종종 현대미술의 심리적 매혹장치로 간주되곤 한다.
한편, 발터 벤야민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저자인 프루스트의 입을 빌어 삶의 모든 순간들이 얼마나 우연적이고 파편적인지, 그 파편적 순간들 사이의 필연적 인과와 연속성이란 얼마나 꿈과 같은 것인지를 역설했다. 이러한 삶 속에서 의미란 밤하늘에 무수히 흩어져 있는 별들 중 임의로 몇 개를 뽑아내고 그것들을 이어내어 별자리를 만들 듯, 그렇게 구성되는 것이라고 벤야민은 말한다.
이제 갓 불혹의 나이를 넘긴 우리 세대의 소설가 김연수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인생에는 진행형 모드와 회고형 모드가 있는데, 논리적으로 일목요연하게 흘러가고 이해되는 인생은 오직 회고형 뿐이라고 말이다. 진행형의 인생에는 도무지 정리되지 않는 파편적인 사건들과 대상들, 의미의 편린들만이 넘쳐나는 법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일생을 이룬다.
2010년 여선구의 작품을 비평했던 알렉스 히빗이 “그의 작품은 다층적인 존재의 기록The work is a multi-layered journal of being.”이라고 평했던 것도 바로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었을까. 그의 작품에서 형상들은 뻔한 의미에 쉬이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선과 악이 하나로 표상되고, 유혹과 구원은 같은 자리에 있으며, 정의와 폭력은 샴쌍둥이와도 같이 한 몸을 이룬다. 이중적이고 모호한 의미들이 쌓여가면서, 쉽게 파악되지 않는, 삶을 고스란히 닮은 의미의 중층 차원을 형성한다.
그렇다고 여선구가 그러한 인생의 우연성, 파편성에만 경도되어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그는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삶의 경험들을 담아내지만, 동시에 그 경험으로부터 보다 근원적인 인간 보편의 어떤 것을 찾아내려고 애쓰는 듯하다. 아니면,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공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달리 말해 그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상징적이고 보편적인 의미의 차원은 의도된 것이라기보다는 보는 이들의 경험에서 생겨나는 공감을 통해 획득된 사후적 결과물일 수도 있겠다는 뜻이다. 작가 개인의 일상적, 비일상적 경험들을 그려낸 드로잉들이 다수가 공유하는 상징적이고 때로는 토템적인 원초적 형상들로 변형되면서 그러한 공감의 지평이 열리고, 개인적 차원과 탈개인적 차원이 교차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그러한 중층의 구축은 실은 상당히 정교하고 체계적인 작업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가 진흙을 주무르고 빚어 기단부로부터 차근차근 형상들을 쌓아가는 과정은 그의 작업의 체계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러한 체계적인 구축성이 형상의 주관적 변형과 필연성 없는 집적, 그리고 무엇보다 표현적이고 우연적으로 보이는 색채에 의해 최종 단계에서 잘 드러나지 않게 가려질 뿐이다. 작가는 유약을 과하게 바르고 가마의 온도를 더 올리는 방식을 통해 작업 과정에 통제하기 어려운 비결정성을 도입했다. 그러나 첫눈에 보는 이를 압도하고 사로잡는 이 색채의 느낌조차도 상당히 잘 계산되고 조율되어 나온 것임이 분명하다. 작품의 모든 부분들의 유약이 흘러내리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유약이 흘러갈 적절한 길이 소조 단계에서부터 만들어진 것 같은 부분들도 있다. 섬세한 준비와 비결정성이 결합되어 비로소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오묘한 색채 효과가 산출된다. 도자 고유의 맑고 투명한, 깊은 빛은 그로테스크한 형상들과 기묘한 불협화음을 이루는 동시에 그 형상들에 반짝임을 선사하여 쉽게 밀어낼 수 없는 매혹의 층을 더한다.
이처럼 여선구의 세라믹 조각들에는 체계성과 우발성, 통제와 자유, 긴장과 이완, 아름다움과 기괴함, 반짝임과 섬뜩함, 희열과 쓰라림이 중층적으로 혼재되어 공존한다. 이러한 혼재, 혼성의 감수성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여선구 작가의 전기적 배경은 도록 서문에 이미 밝혀져 있다. 하지만 그는 ‘이방인’, ‘주변인’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만큼 미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들은 미국에서 작업하는 수많은 이민족 작가들의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주변부적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30년과 25년이라는 세월에 질량차가 그리 크지 않은 만큼, 그의 작품들에서 동서양의 이질적인 가치관과 문화, 형상들은 치우침 없이 혼재되어 있다. 그리고 이제 그 혼재는 그에게 불편하지도 않은 ‘일상’이 된 듯하다. 그가 자신의 작품을 “일상적 경험의 기록”journal of everyday experiences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이 아닐까. 차이나는 것들의 혼재는 그에게 갈등의 원인이 아닌 것 같다. 그는 자유롭게 서양적인 것들을 끌고 오고, 또 안 끌고 오기도 한다. 이번 클레이아크 미술관의 작업실에 머물며 만든 작품들에는 확실히 미국 생활의 흔적들이 별로 없다. 다시 말해, 미국에 오래 산 작가가 한국에 와서 드러내게 될 수도 있을 어색함이 안 보인다는 것이다. 그에게 혼재, 혼성은 일상이고, 자연이고, 자유의 경지에 이른 듯하다.
이런 이질적인 것들과 삶의 모순, 부조리가 빚어내는 아이러니를 어느 한 쪽으로 애써 수렴시키지 않고 한 차원 고양된 마음으로 수용하는 것을 독일 문예이론가들은 “후모”Humor, 유머, 해학라고 불러왔다. 여선구는 한국의 민화에서 해학의 즐거움을 발견했고, 그것을 이 다문화 시대의 형상으로 다시 빚어내었다.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해학은 이질적인 것들의 혼재, 혹은 혼돈을 그 모습 그대로 인생의 질서로 받아들여 비로소 생겨난 것이다. 다시 말해, 작가가 편안해졌을 때라야 해학은 배어나올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여선구의 작품들은 시대와 지역에 의해 결정된 타의적 인생 조건들 속에서 그가 겪어야 했던 마음고생을 치유하는 과정이자, 성공적인 결과물이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그의 작품들은 그 자신만을 위한 치유로 그치지 않는다. 여선구의 작품들을 처음 마주 대할 때 움찔하며 느끼게 되는 언캐니의 감정은 작품들이 보는 이의 마음 깊은 곳에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던, 그러나 결코 완전히 치워버릴 수는 없었던 삶의 이질적인 면면들을 휘저어, 보는 이들에게 스스로의 삶을 들여다보는 반조적 경험을 일으킨다. 작품들이 구현하고 있는 혼성의 감각, 혼재의 인생관이 보는 이의 삶과 만나 공명하는 순간, 작품들은 더 이상 언캐니로 남지 않고 도리어 마음 편안하고 친숙한 것으로 탈바꿈한다. 변형은 그의 작품 조형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그의 작품들을 보면 볼수록 점점 더 마음이 풀어지고 하릴없이 흔쾌해지는 까닭은 고향을 떠나 이방인으로 살 건, 아니면 단 한 번도 이방인이 된 적이 없건 간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개별자로서의 삶의 차이와 그로 인한 힘겨움이 누구나의 속내에건 켜켜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을 눈으로 어루만지고 돌아가는 길에 마음이 푸근한 까닭이 여기 있다. 아이러니의 형을 빚어 해학의 빛으로 결정시킨 여선구의 세라믹 조각들의 대규모 전시가 새삼 고맙고 반가울 따름이다.
여선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