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도자예술, 그 미적가치와 가격사이의 간극
역사를 통해 본 차도구의 문화와 경제적 가치
하일남 동양다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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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한 가뭄으로 밭에서는 먼지가 날리고 논바닥은 거미줄처럼 쩍쩍 갈라지고 찢어졌다. 농부의 간장을 에는 한숨이 들린다. 첫눈에 비친 늙은 호박만한 거무튀튀한 도기덩어리는 나를 그렇게 유혹했다. 15도 각도만 벗어나면 구름 한 점 없는 땡볕이 금모래 흩뿌리는 파편처럼, 또 다르게는 호수의 파문처럼 파랑이 일거나, 창세기 코스모스 혼돈처럼 육중한 힘이 실려 보이기도 한다. 일 년이 24절기로 바뀌듯 도기 덩어리는 각도 따라 각각 다른 광경을 연출해 준다. 흙덩어리가 불속에서 소우주로 태어난 아름다움이다. 위쪽을 보니 예리한 메스로 사다리꼴 선을 그어 놓았다. 잡아 뽑아 올려보니 안쪽에는 비밀의 계단처럼 사면에서 내려가는 계단이 몇 층 내려가다 말고 어둠의 공간이다. 영점영영일 밀리미터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치밀한 작위가 불이 연출한 껍데기와 조화롭다. 10여 년 전 감격스럽게 본 도자기가 기억으로 남아있는 모습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입구의 돌』처럼 신비한 작품에서 뿜어 나오는 에너지? 희열? 그런 느낌을 갖게 하는 도자기의 가치는 값을 헤아리기 어렵다.
앞의 이야기가 몽환적 작품의 매력이라면 생활에서 쉽게 쓰이는 도자기의 실례를 보자. 가루차를 마시는 찻사발 혹 다완이라고 한다. 흙을 준비하고 성형, 유약작업, 소성. 그리고 사이사이 건조, 물닦기, 깍고 다듬기, 그림이나 상감 등 손이 닿고, 머리 쓰고, 관심을 두어야 하는 공정이 죄다 계량된다. 계량되는 것은 그 가치가 쉽게 계산된다. 원가가 계산된다. 그래서 소비자들은 손쉽게 구입할 수 있고 가격이 싼 제품을 선호한다고 보고 생산하는 생산자가 있게 된다. 그러나 어떤 소비자들은 가장 뛰어난 품질, 성능, 기술(예술포함)을 보유한 제품을 선호한다. 그래서 고객의 필요와 욕구를 파악해서 그 욕구를 만족 시키고, 나아가 구매자와 판매자는 서로의 가치를 교환하는 과정에 참여하게 되므로 이러한 교환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는 생산자도 있게 되는 것이다.
760년부터 20년여에 걸쳐 저술된(류건집 『다경주해』, p10) 육우의 『다경』을 보면 ‘완盌은 월주의 것이 상품이고, 정주鼎州의 것이 차등품이다. 어떤 이는 형주의 것을 보다 위에 두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다. 만약 형주 것을 은에 비한다면, 월주의 자기는 옥이다. 형주자기가 눈雪과 같다면 월주의 것은 얼음과 같다. 형주 것은 백색이어서 차탕색이 붉은데 월주의 자기는 청색이어서 차탕의 빛깔이 녹색이다.’라고 쓰여있다. 주체가 되는 차탕의 빛깔을 잘 들어낸다는 기능에 중점을 두어 평가한 내용이다. 또 진進나라 두육杜毓이 쓴 “천부荈賦”를 인용하여 구(최상품의잔)는 월주산이 입술이 안으로 말리지 않았고 밑이 옴팡하고 얕아서 차 마시기 좋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사기의 용도를 강조하고 예술성에 대한 언급은 없다.
어느 전시회에 선보인 차항아리
‘신안해저유물’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1976년 신안 앞바다에서 14세기 중국 무역선으로 추정되는 침몰선이 발견되었다. 그 유물은 1만 8000여 점에 달하였는데, 이 중 청자가 9,600여 점으로 가장 많다. 청자 중에 고려청자 3점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청자음각연당초문매병靑瓷陰刻蓮唐草文梅甁 1점, 청자상감운학문대접靑瓷象嵌雲鶴文大楪 1점, 청자상감연당초문잔대靑瓷象嵌蓮唐草文盞臺 1점이다. 그 밖의 청자는 중국 저장성浙江省 룽취안요 계통으로 원대元代의 작품이 대부분이고, 백자는 중국 장시성江西省 징더전요景德鎭窯 계통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유약에 약간 푸른색이 도는 청백자 계통과 흰 순백자 계통으로 나눌 수 있다. 그밖에 은으로 만든 정병淨甁, 청동으로 만든 촛대, 돌로 만든 벼루, 유리제품도 있고, 불상 등도 나왔다. 목간木簡은 물표物標가 대부분인데 ‘지치 3년 6월 1일至治三年六月一日’이라는 글씨가 나왔다. 일본 유물로서 왜 나막신게타·일본도刀·청동거울·장기·칠기·도기 등 생활용구가 일부 인양된 것으로 보아 이 배는 당시 일본을 왕래한 중국의 무역선으로 추정되며, 1323년에 가까운 어느 시기에 침몰되었음이 분명하다.’ 중국에서 일본으로 많은 도자기가 팔려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자기가 제조된 시기는 1616년으로 추정된다. 자기를 처음 개척한 이는 조선에서 피납 된 도공 이삼평이라는 주장과, 일본인 이에나가家永壹岐守라고 그 후손이 탄원한 사실을 근거로 하는 것과, 조선도공 심해종전深海宗傳이 자기창성을 주도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심해가 만든 시기가 빠르다. 심해종전深海宗傳은 1594년 다케오령武雄領 영주 고토오이에노부後藤家信, 1563~1622에게 이끌려 아마리항에 상륙, 다케오武雄에 도착했다. 그의 나이 36세 때 부인 백파선白婆仙과 가족일행이 있었다고 아리타마치사有田町史는 적고 있다. 아리타야키사 통사편 유전정(1986.p36) 기록으로는 ‘증조할아버지 부부는 광복사의 벳지우 화상을 따라 다케오에 와서 수년간을 광복사의 문전에서 살았다. 얼마 뒤 증조 할아버지는 이에노부로부터 우치다촌에 있는 토지를 받게 되어 그곳에서 도기를 구으면서 자신이 만든 차완과 향로를 이에노부와 벳지우에게 헌상하였다. 증조할아버지는 겐와 4년(1618) 10월 29일 세상을 떠났다. 법호가 ‘천실종전’이었다. 증조할머니는 남편 사후에 우치다촌을 떠나 히코바로 이주했다. 이주한 이유는 우수한 도석이 산출되는 곳이어서 그곳을 바로 하늘이 주신 제도지라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조선에서 도래한 사람들은 모두가 우치다를 떠나 히코바로 이주했다. 증조할머니는 메이레키 2년(1656) 3월 10일에 별세하였다. 손자들이 존경하여 ‘백파선’이라 존칭하였다.’
한편, 헤이안 시대 말 1191년 에이사이선사가 송에서 돌아와 차를 전파하였다. 귀국 후 지쿠젠지방의 세부리산背振山에 가지고 온 차 씨를 심었다. 교토에 자리를 잡은 후 도가노오栂尾의 고잔사高山寺에 있는 큰스님 묘에明惠 1173~1232에게 차씨5개를 선물로 보냈는데 묘에가 도가노오에 심었더니 잘 자랐다. 이차를 특별히 본차本茶라고 하고 그 밖의 지역에서 생산되는 차는 비차非茶라 한다. 무로마치시대1336~1573에는 투차가 유행했다. 1444년경 성립된 ‘애낭초 壒囊抄’의 기록은 십복차는 3종류의 차를 가지고 각각 4잔씩 만들어 두었다가 한잔씩 음미한 뒤에 나머지 3잔씩 9잔을 마신다. 본차와 비차를 알아맞힌다. 투차가 도박이 되자 1335년 발령하여 금지시켰다. 그 후 상류사회에서는 ‘회소’에서 차를 즐기고 문방구나 다도구를 관상하는 다회가 열렸다. 산해진미의 식사를 하고 중국그림을 걸고 화려하게 장식한 정자에서 손님 일동에게 말차를 담은 천목다완을 나눠준다. 이어서 급사가 뜨거운 물을 넣은 병과 차선을 가지고 나와서 손님이 내미는 다완에 물을 넣고 차선으로 휘져어 주면 손은 마시고 다시 천목다완을 나누어 준다. 여러 차례 차를 마시면서 주위에 장식된 서화를 감상하고 풍아한 취미를 즐기는 것이다. 지금도 교토의 겐닌사에 남아있는 ‘요츠카시라노시키’라는 사찰의 다회양식과 흡사하다.
제8대 쇼군 요시마사1435~1490는 정치보다 조용히 자신의 취미대로 문화계의 지식인들, 오산의 승려나 화가, 음악가들과 교류하며 대화하는 것이었다. ‘야마노우에노소지기’에 의하면 요시마사는 히가시야마 산기슭의 지죠사(통칭 은각사)에 은거한 뒤로는 렌가, 달구경, 꽃구경, 그림, 축국, 풀놀이 등 다양한 놀이를 개최하면서 매일같이 풍류삼매의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어느 날은 측근의 연예인들 가운데 노아미能阿弥, 1397-1471는 족리의정(足利義政)의 도보슈로서 아미파의 시조, 렌가 시인이자 화가, 감정, 다도, 향도 등에도 뛰어난 인물)를 불러 “옛날부터 전해지는 여러 가지 예능은 모조리 다 해보았다. 무언가 색다른 것이 없는가?” 라고 물었다. 노아미는 “다도가 있습니다. 이것은 무라타 슈코1423~1510라는 법사가 30여 년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요시마사는 당시 다이토쿠사에 머물던 슈코를 곧 불러 들였다. 슈코는 나라 지방 쇼묘사의 승려로 있었지만 잇큐선사를 추앙하면서부터 그 문하에 들어가서 참선하며 제자가 되었고 그 징표로 중국 승려 환오극근이 쓴 족자를 전수받았다고 전해진다.
나라 지방에서는 가마쿠라시대부터 차를 마시는 풍습이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나라에서는 많은 인파가 모여 소란스럽게 놀며 차를 마신다. 슈코는 이런 식의 야단법석 소동을 피우는 방식을 싫어하여 초암에서 여는 조용한 다도를 고안하고 있었던 것이다. 슈코가 고안했다는 초암차는 당시 매월당이 염포울산를 무대로 ‘도이거’란 왜관의 풍경을 시로 지었고 준俊 상인上人이 찾아와 법을 청하고 돌아가 슈코와 만난 정황으로 보아 매월당의 사조와 초암차를 영향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노아미가 슈코를 요시마사에게 추천한 것은 슈코가 이러한 서민적인 나라류의 다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노아미는 자신이 제정한 대자의 다도는 분위가 너무 딱딱하다는 것을 느끼고 나라류의 다도를 도입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요시마사에게 불려온 슈코는 자신의 차 방식에 대해서, 여러 가지 질문을 받았다.「슈코문답」에 의하면, 차란, ‘모두가 함께 청정하여, 불법에 기쁨을 느끼고 선의 즐거움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다례의 극치’라고 말했다. 다실에 들어가면 밖으로는 남과 나의 사이를 모두 잊고, 안으로 유화한 덕을 갖추고 친하게 서로 받들고 즐기며 덕을 기르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슈코일지 목록’이란 슈코가 노아미 에게 배운 매우 소중한 다기감정법과 수업 중에 묻고 대답한 것을 기록한 일기다. 센노리큐의 제자 야마노 우에노 쇼지는 슈코일지에서 좋은 다도구란 슈코, 인세쓰, 조오, 리큐 등의 명인들이 마음에 들어 선호한 것들을 말한다. 명물 다도구 목록은 먼저 명칭을 적고 작명 유래를 설명하고 실제 규격을 수치로 표기하고, 특징적인 모습과 형태를 기술하고, 소지자와 전래 인물을 나열하고, 마지막 가격에 대해 적는다 하였다. 쇼지는 슈코가 명물로 인정한 큰 차항아리가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평을 들며 ‘다인은 다도구 감정능력이 중요 덕목이다. 메아키目明는 와비차의 기원이 되는 노아미 시대로 부터 시작되는 명인의 덕목이다. 메키키目聞, 目利 감정능력는 명물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한다면, 메아키는 모든 기물에 대하여 다도구에 적합한지 어떤지를 평가할 수 있는 안목을 말한다. 명물 다도구에는 각 도구마다 주요한 메키키의 포인트가 있으므로, 감정을 할 때는 어디까지나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메키키에서 가장 꺼리는 일은 단지 명물도구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훌륭한 기물로서 평가하는 것이다. 메키키目聞를 넘어 메아키目明가 되려면 순수한 마음으로 다도구를 바라볼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하다.’라고 다도구를 보는 사람의 마음이 어떠해야하는지를 강조하고 있다.
노부가나를 이어 히데요시는 전국戰國을 평정하여 천하통일을 이루고자했다. 그러기 위해서 병법은 물론 토지의 소유, 상업, 유통의 구조를 바꿨다. 국가의 부가 되는 조세를 중앙이 장악하고 교환 수단의 혁명을 이뤄야했다. 다도를 정치에 이용했다. [오차노유고세도御茶の湯御政道]는 히데요시가 그들에게 굴복한 이들에게 강제로 헌납을 받거나 전리품으로 빼앗은 명물 다도구를 특별한 공적을 세운 무사들에게 하사하여 명예와 권위를 부여하므로 그 공적을 보상하였다. 명물 다도구로 나눠 주던 영지의 관행을 혁파한 것이다.
약속을 재현한 사발
일찍 고려청자를 생산했던 우리나라 지식계층은 어떠했는가?
신라와 고려는 대체로 귀족사회였다. 고려 말 신유학의 성립으로 사회질서가 바뀌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상층부는 양반사회로 관료가, 하층에서는 농공상의 서민계층이 성립되었다. 농공상과 함께 4민의 하나로 불린 선비士가 있다. 선비는 농공상과 같이 4민으로 불렸어도 그 지위는 이들과 동열은 아니며 양반에 포함된다.(양반이란 신분이며 계층에서 상층이다.) 책을 읽는 이는 선비가 되고, 정계에 나아가면 대부가 되며 덕이 있으면 군자가 된다. 책을 읽어 궁극적으로 정계에 진출하기 때문에 이들을 사대부라 한다. 그러나 선비는 상층부의 관료들과는 거리가 있다. 일반 백성들의 상황을 대변 해 주는 것이 선비의 임무 같기도 했다. 선비들 중에는 중소지주 출신들이 많고 가난한사람도 많기 때문에 일반농민들의 이익을 대변해 줄 수 있는 것이다. 선비들과 농민들의 이해가 상이 할 때는 문제지만 중앙의 권력층이나 대토지 소유자들에 대해서는 이해가 일치되었다. 그런 대변을 통해 지나친 정치적 모순을 줄여주는 역할을 선비가 했다. 벼슬을 안했지만 지방에 있어서 그 나름의 생활문화를 발전시키면서 지방의 풍기를 단속하고, 지방사회의 좋은 전통을 부활시키는 역할을 자처하였다. 그것은 유교적이었고 유교의 기준에 맞지 않을 때는 도리에 어긋난다 하여 서민들을 억압하여 그들 고유의 전통과 관습을 폐하여 전통적인 문화가 소멸 된 것도 많다 할 것이다. 선비는 행동규범이 예와 의를 다하는 지조가 있어야 했으므로 상업과 공업은 천대하였고, 극심한 가난이라도 유유자적 일관 하며 시조를 짓고 백자를 사랑하며 문인화 수묵화를 즐겨 그렸다. 이렇듯 중추적인 조선의 선비는 아쉽게도 천민인 사기장과의 계급차이, 지조를 내세워 고픈 배를 참는 선비정신 때문에 도자기의 가치를 재화로 바꾸는 재주는 없었다.
승려이기도 하지만 선비의 표상이라 할 매월당 김시습. 그의 유유자적한 마음이 담긴 초암다도를 지향하여 와비다도의 초조初祖가 되는 슈코는 다도구의 이물理物을 언급하였다. 이 다도구 물物을 일본의 상층부 지배자들이 이용한 일본의 구조가 우리나라 형이상학적 문화와 일본의 차문화를 큰 간격으로 바꾸어 논 것이다.
인사동 점포에 진열된 찻사발
도심의 한 카페에 놓인 재털이용 사발
지금, 모방에 지나지 않는 다완을 별 설득력이 없는데도 사기장은 어렵다고 비싸게 만들고 소비자는 비싸서 신기하게 여긴다. 정호다완의 일곱 가지 약속이니, 교맥다완의 여덟 가지나 되는 약속이 구속하기 때문은 아닌지? 16세기말 돈이 되는 다도구를 통제하기위한 수단의 일본전통이 어설프게 지금껏 소비자의 마음을 잡고 있거나 사기장의 창작을 방해한다고 여겨지는 대목이다.
참고자료
김봉기 『매월당집梅月堂集』 1927.
박정상 『찻사발』 태학원 1999.
오주석 『한국의 미 특강』 솔출판사 2010.
지두환 『한국사상사』 역사문화 1999.
센겐시쓰千玄室저. 박전열 역. 『일본다도의 정신』 시사출판 2008.
육우/유건집 『다경주해』 이른아침 2010.
육우/정영선편역 『육우의다경』 너럭바위 2011.
국제문화재단편 『한국의 선비문화』 시사영어사 1973.
박민정 <‘산상종이기山上宗二記’에 나타난 다인관> 중앙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2006.12
이원홍 <조선도공 일본시말기> 『차의세계』 2013년 4월호 60~69쪽
필자 하일남은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차학회 부회장을 역임, 현재 상임이사로 활동 중이다. 사발공모전을 10년간 주관했으며, 현재 농업회사 법인 (주)동천이사로 다원茶園을 경영하고 있다. 1993년부터는 서울 인사동에서 ‘동양다예’를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