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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7월호 | 전시토픽 ]

야나기 무네요시
  • 편집부
  • 등록 2013-07-03 10:25:59
  • 수정 2013-07-03 10:2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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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 무네요시

Yanagi Muneyoshi

2013.5.25~7.21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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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일본민예관 소장품을 중심으로 한 <야나기 무네요시>전을 5월 25일부터 7월 21일까지 선보이고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 1889~1961는 일본의 근대 공예운동가, 이론가, 수집가로 잘 알려져 있다. 이번 전시는 그가 평소 수집하고 소장했던 공예품과 활동자료 중 현재 일본민예관에 보관된 총 139점이 소개됐다.

이번 전시는 단순히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의 예술에 대한 시각을 이해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의 공예론이 형성된 과정과 특성을 이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마련됐다. 총 세 편으로 구성된 전시에는 그의 삶과 철학을 비롯해 서양의 근대문예사조로부터 받은 영향, 조선과 동양미술을 통해 그가 만들어낸 미학과 공예관, 민중미술에 대한 관심이 잘 나타나 있다.

 

 

서양의 미술, 문화 그리고 버나드 리치와의 인연

제 1부는 《유럽 근대문화에 대한 관심과 연구-시라카바白樺, 윌리엄 블레이크 그리고 버나드 리치》를 주제로 펼쳐졌다. 1910년대부터 일본 미술계에서는 일본과 유럽의 교류를 도모하고 유럽예술계의 정보습득과 새로운 경향을 이입하려는 노력이 여러 경로를 통해 활발하게 이뤄졌다. 『시라카바白樺』는 1910 년부터 1923 년까지 야나기 무네요시를 비롯한 시가 나오야志賀直哉, 1883~1971, 문학가, 무샤노코지 사네야츠武者小路實篤, 1885~1976, 문학가, 기시다 류세이岸田劉生, 1891~1929, 화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81~1930, 종교 사상가 등이 참여해 기독교 신학을 비롯한 서양철학, 서양미술 등 서양문화를 중점적으로 다뤘던 서적이다. 당시 야나기 무네요시의 역할은 기획, 편집에서부터 표지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졌다. 서양으로 눈이 향해있던 야나기는 1914 년 『윌리엄 블레이크』라는 단행본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의 복제판화를 수집, 1919년에는 ‘윌리엄 블레이크 복제판화 전람회’를 개최했다. 전시에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아담을 심판하는 신」이 소개됐다. 한편 야나기는 1909 년에 일본을 방문한 버나드 리치Bernard Leach, 1887~1979로부터 에칭etching 제작방법을 배우고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를 접하게 됐다. 1909년부터 영국으로 귀국하는 1920년까지의 일본체류기간 동안 버나드 리치는 야나기에게 단순히 서양미술을 소개하는 매개자로서가 아니라 절친한 친구 겸 예술동반자였다. 작품으로는 버나드 리치의 「숲 속의 호랑이」가 전시됐다. 「숲 속의 호랑이」는 4장의 도자타일로 구성돼 독특한 디자인의 철제 테두리로 형태를 잡은 작품이다. 작품의 윗부분에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삽입, 아랫부분은 호랑이, 나무, 소녀를 그려 넣었다.

 

조선과의 만남

제 2부에서는 야나기의 수집품 중 조선 공예품을 선보인 《조선과의 만남-동양의 조형미에 대한 인식》이 펼쳐졌다. 야나기가 조선도자기를 접한 시점은 1909 년 『시라카바』 활동을 준비할 무렵 골동품점에서 「모란무늬항아리」 한 점을 구입하게 되면서부터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야나기 무네요시의 관심이 조선으로 향하게 된 것은 조각가였던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伯敎, 1884~1964로부터 선물받은 조선시대 도자기 한 점을 보게 되면서부터 시작됐다. 아사카와 형제들의 도움으로 그는 경성(현 서울), 경주 등 잘 알려진 도시를 비롯한 계룡산 가마와 같은 공예품 생산지를 여행하며 수집을 행했다. 수집했던 공예품은 사람들로부터 크게 주목받고 있지 않았던 것들을 수집했는데 고려시대, 조선시대 도자기를 시작으로 하여 가구, 각종 기구, 회화, 자수, 금속공예, 목공예, 석공예 등 전방위에 걸쳐져 있다. 야나기는 이러한 공예품에는 조선민족의 정서가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했고, 식민지 조선인들에 대한 애정을 가지게 됐다. 조선의 고유한 전통문화가 일본군의 탄압에 의해 소실될 수도 있음을 우려했고 1924년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 이러한 수집활동을 통해 전개했던 연구와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한국의 미에 대해 나름의 견해를 내세웠다. 1916 년부터 1940 년까지 21 차례에 걸친 조선 여행을 통해 야나기의 조선예술에 대한 인식은 기본적인 지식이 전무한 상황에서 점차 변화해 1920 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예술이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태어난 것’으로서 ‘무심’, ‘무작위’, ‘무의식’과 같은 개념으로서 설명했다. 20세기 초 한국에서 미술사에 대한 개념과 지식이 부족했던 상황에서 그의 미학은 조선의 이미지에 상당한 부분을 차지했고 21세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전시된 공예품으로는 17세기에서 20세기 사이 제작된「철사운죽문항아리」와 「연잎형개다리소반」, 「담배상자」 등이 있다.

 

민중적 공예

제 3부 《주변에 대한 관심 그리고 민예》에서는 동양의 아름다움에 대한 야나기의 시각이 중국, 만주, 일본 등지로 확대된 모습을 보여준다. 야나기는 191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수차례 중국을 방문, 여러 지역의 공예품을 수집했다. 조선과 중국 여행을 통해 받았던 문화적 영향이 컸던 만큼 서양으로의 관심을 동양으로의 관심으로 바꿨다. 이중 전시된 모쿠지키 쇼닌의 「허공장보살상」은 1924년 야나기가 우연히 발견한 일본의 불상이다. 그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 불상을 조사했고 일본 전국에서 300 개 이상의 불상과 자필문서를 더 발견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그는 『모쿠지키쇼난연구木喰上人之硏究』(총 7 권) 저서(1925 년)를 발간, 모쿠지키에 대한 재발견의 계기를 이끌어내게 됐다. 한편 야나기는 모쿠지키 불상 조사를 통해 무명의 사람이 제작한 평범한 물품이 진정한 아름다움을 담을 수 있는 ‘민예’의 개념을 만들어내었다. 이 말은 ‘민중적 공예’라는 의미로서 민간에서 사용되는 일상품을 의미하며, 고급미술보다는 이름 없는 장인들이 만들어내는 실용적인 공예를 강조하게 된다. 야나기는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일본 본토, 아이누, 류큐 등지의 민예품에도 관심을 가지고 작품을 수집했다. 전시된 민예품을 살펴보면 대부분 자연에서부터 출발한 그 지역의 사회적, 문화적 특징을 잘 드러낸 작품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관계자는 이번 전시에 대해 “생활과 문화를 의미하는 민예의 개념을 통해 일상생활 속에서 예술적 감성을 담아내고자 하는 오늘날의 모습을 반추하기 위해 이번 전시를 마련했다. 인본주의, 평화주의 사상에 기반을 두고서 20 세기 초 동아시아의 험난했던 정치사회적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펼쳤던 그의 예술론 및 활동을 살펴보는 이번 전시를 통해 관람객들이 그의 미학을 깊이 이해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전한다.

김성희 기자 masader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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