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훈 투각도자기전
드러냄과 감춤, 그 경계 위에서
2013.3.12~3.24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_?xml_: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도예작가 이정훈이 전시를 열었다. 네 번째다. 그만큼의 세월이 도자의 겉과 속을 스치고 파고들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의 작업을 지켜보았으니 이 글도 네 번째다. 혁명을 꿈꿔도 모자랄 미술이 제도화, 아니 세속화되어 평범한 아름다움으로 전락해버린 세월 속에서 삶의 표정을 담아 작업하겠다는 작가의 곁을 지킨 시간이었다. 자유로운 듯 보이지만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위계와 권력의 편협함으로 점철된 미술계에서 우리 두 사람이 견뎠다는 얘기일 테니 술잔을 부딪쳐도 좋을 것 같다. 그것이 미술이든, 다른 일이든, 자고로 계속하는 자에게, 오래하는 자에게 세상은 말을 거는 법이다. 우리는 이 일을 계속해야만 한다.
슬픈 그릇. 버려지고 버려지는 슬픔 끝에 간택되어서일까. 나에게 도자기는 늘 서럽게 다가온다. 비어 있는 공간에 슬픔이 차올라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다. 그런데 이 그릇이 더욱 슬픈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현란한 속도를 자랑하는 세상과 미술의 변화 속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버티는 모습은 참으로 눈물겹다. 미술이라는 라벨이 붙은 모든 작업이 그렇지 않겠냐마는 나는 도자기만큼 ‘시간’의 내성을 보유한 건 없다고 믿는다. 대부분의 작업이 작가의 몸에서 떨어지는 순간 완성을 말하지만, 오직 도자만큼은 뜨거운 불구덩이에서의 시간을 또다시 견뎌야 하는 숙명을 지닌다. 그 시간을 감내해야 도자는 자신의 몸을 갖추게 된다. 제 몸 여기저기에 도공의 상상력을 덕지덕지 붙인 채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고 정좌해 있는 모습은 실로 우아하다. 그것이 고귀하든 소탈하든, 그 모습에는 거역할 수 없는 존엄이 있다. 애나 어른이나 손이 아닌 눈으로 도자를 어루만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아름다움이라는 감정을 넘어 시간의 기억이 리얼하게 배어 있다는 본능적인 체감 앞에서 주춤거리기 때문이리라. 그것이 바로 스펙터클한 우리 시대에 도자의 생명력이 면면히 이어져오는 까닭이다. 네 번째 전시에서 이정훈의 도자는 작가로서의 갈망을 빚는 것을 넘어 이 지점에 다다른 듯하다. 작가의 손에서 잉태한 피붙이들의 생김생김과 타고난 성품을 논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이정훈의 지난 시간은 비평의 대상이 될 만하다. 누가 그랬던가. 시는 언어의 음악이라고. 나는 이렇게 말하려 한다. 도자는 흙의 음악이라고. 무엇을 노래하는지 알아차릴 수 없는 흥얼거림 속에 삶의 희로애락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천상의 음악이라고.
모두가 좋은 작업을 보고자 한다. 좋은 작업의 기준이란 여러 가지일 테지만, 나는 하나를 포기하는 대신 다른 하나를 얻는 방법을 아는 작업을 그중 하나로 꼽는다. 작가의 내밀한 자아를, 시대를 관통하는 주제를, 영원히 변치 않는 예술의 목표를 드러내는 작업, 반대로 그것을 철저히 감추는 작업에서 희열을 느낀다. 좋은 작가는 그 사이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있다. 그런데 더 좋은 작업이 있으니, 그것은 그 사이의 공간을 소요하는 것이다. 그 경계를 즐기는 것이다. 자신에게 침잠해 있던 발걸음을 예술이라는 노스탤지어로 조금씩 옮기는 작가, 그리고 그 중간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멈출 수 있는 작가. 자아와 미술의 경계, 그 사이. 지금 이정훈은 산책중이다. 그 산책이 어디에서 시작되어야 하는지, 어떤 지점에서 멈춰야 하는지 알기에 걱정이 없다.
윤동희 북노마드 대표 / 미술무크지 『debut』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