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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3월호 | 작가 리뷰 ]

박부원-한국미의 얼굴, 지당의 도예세계
  • 편집부
  • 등록 2013-03-27 18:05:30
  • 수정 2013-03-29 10: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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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부원

한국미의 얼굴, 지당의 도예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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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식 고신대 교수, 독수리학교 이사장

 

 

누가 나더러 한국의 예술미를 몇 가지 들라하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비취색의 청자매병, 질박하면서도 풍만한 백자 달항아리, 소박하면서도 고적한 정취를 풍기는 분청 다완, 화산토 태토胎土에 재가 녹아 유약이 된 제주허벅, 치밀한 짜임새와 고도의 세련미를 보이는 다보탑, 간결한 선과 명확한 면이 결합된 단아한 사방탁자, 흐르는 물의 동적 원리와 견고한 바위의 정적 원리가 조화를 이룬 조선정자 등 일곱 가지를 들 것이다.

이천년 우리 예술사가 남긴 숱한 명품들 중에서의 내 나름의 어설픈 간택이지만 한결같이 우리 전통예술이 지니는 단아함과 소박함의 멋, 고고함과 우아함의 미, 그리고 푸근함과 따스함의 정을 지닌 것들이다. 육중한 무게와 거대한 부피로 압도하는 기세등등한 중국예술이나 화려하게 단장하여 교태를 부리는 일본예술과 달리 위협적이지도 않고 또 추파를 던지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거기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묵묵하게 긴 세월을 견디며 그저 우리가 다가오길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일곱 가지 우리 예술미의 걸작들은 나무나 돌이 재료가 되기도 했지만 무려 절반이 넘는 네 가지가 도공들에 의해 빚어진 도자기류임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도자기는 한국 전통예술의 얼굴이요, 우리 전통미의 대표격인 셈이다. 귀족 같은 고려청자는 우아미優雅美를, 선비 같은 조선백자는 숭고미崇高美를, 다인茶人같은 분청사발은 고적미孤寂美를, 민초 같은 허벅은 질박미質朴美를 보여준다.

그런데 우리 도자기들이 갖는 이런 다양한 이미지와 여러 가지 아름다움을 한꺼번에 다 드러내어주는 것이 없을까? 아니, 있다! 그것이 바로 지당志堂 박부원朴富元 선생의 도예 작품들이다. 지당의 붉은 주동채병은 청자매병의 고아함을, 그의 설백색 달항아리와 백자각호는 조선백자의 숭고함을, 그의 갯벌 다완, 설경다완, 황도사발은 분청사발의 처연함을, 그의 석간주수호石間硃水壺와 이귀 귀얄문 항아리는 제주허벅의 질박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새로 태어난 그의 분청청채달항아리는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아! 지당의 도예작품들은 과연 한국미의 정수요 한국예술의 얼굴이다.

그러면 이제 그의 도자세계가 보여주는 깊은 의미들을 찾아 나서 보기로 하자. 지당의 도자는 과연 어떠하던가?

 

그것은 비움과 채움의 도자다

지당선생의 도예들은 한결같이 비워져 있다. 중국도자들은 잔뜩 그림들로 채워져 있고, 일본자기들은 온통 작위적인 손질로 가득차 있다. 우리 도공들도 백자나 주동채자기를 만들 때 온갖 글자를 써넣고 갖가지 그림을 그려 넣는다. 그러다보니 그 그림과 글자로 인해 정작 도자의 본 모습은 드러나지 않던지 또는 빛바래지게 된다. 그것은 흡사 여인이 맨얼굴을 드러내기 싫어 머리를 풀어헤친 것과 같고, 볼품없는 모습을 가리기 위해 온 몸에 장식품을 단 것과 방불하다.

하지만 지당의 백자나 분청, 주동채와 흑유는 가능한 모든 작위적인 장식을 버린 채 비어있는 모습 그대로 나타난다. 어쩌다 군무群舞상 한 두점, 노루 그림 두어 점, 반구대 암각화 서너 점, 그리고 연화문 정도지 도자의 겉과 안은 비어있기 일쑤다. 그의 달항아리에는 해주항아리에서 보이는 별난 그림들이 보이지 않으며, 심지어 청송백자의 초화문草花紋처럼 값비싼 청화를 한두 획 찍는 도공의 객기도 눈에 띄지 않는다. 굳이 있다고 강변한다면 요변에서 이뤄진 불장난 그림火戱畵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그의 작품에는 한국예술의 특징인 무작위성無作爲性이 잘 드러난다. 인위적으로 그린 형상이 드물 뿐 아니라 화학적 유약을 사용하여 만든 조야하면서 현란한 색상도 없다.

장자莊子에게서도 산수화 같은 예술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담연淡然의 미였다. 그의 지론에 따르면 많은 무늬는 한 무늬의 심오함에 이르지 못하고, 한 무늬도 무늬 없음의 깊이에 다다르지 못한다. 이는 마치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가 백색의 절대성을 깨뜨린다고 생각하여 하루 종일 캔버스 앞에 앉아서도 점하나 찍지 못한 것과 유사하다.

이처럼 지당의 도자들도 한결같이 담백하여 맑은 물萬年淸水같다. 아니 자신을 다 비운 가난한 마음 같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작품들에 다가가면 가까이서나 멀리서나 우리 눈에는 많은 형상들과 숱한 색상들이 들어온다.

멀리서 보면 노루가 뛰노는 푸른 언덕, 산을 타 오르는 아침 안개, 광활하게 펼쳐진 붉은 황야, 온갖 생명의 흔적들이 남아있는 검은 갯벌, 푸른 물결 넘실대는 망망대해, 저녁노을 붉게 물든 서쪽하늘, 그리고 추상화가의 노련한 붓질로 그려진 외계의 기하학적 문양들과 형상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현미경을 가지고 식물의 세포를 관찰하듯이 도자기들의 표면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아! 거기에 어린 누이동생의 풋풋한 머릿결, 초가집 처마를 타고 내리는 봄날의 빗줄기, 억수같이 쏟아져 내려오는 깊은 계곡의 폭포수, 하늘을 뒤덮은 빽빽한 대나무 숲, 앙증맞은 겨울 눈밭의 노루발자국, 화산구에서 제멋대로 흘러내려오는 불의 강, 밤하늘을 촘촘하게 수놓은 은하의 시내, 뻐꿈뻐꿈하게 파여진 신비한 달 분화구, 한여름 우리 집 소소가蕭蕭家 석류나무 위로 휘영청 떨어지던 푸른 달빛, 또한 소싯적 나를 잠 못 이루게 하며 남쪽 하늘로 휙 떨어지던 별똥별들이 보인다. 아! 지당의 도자세계 안에는 내 고향이 있었다.

이렇게 무늬의 저편, 장식의 저편에는 셈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그림들과 형언하기 힘든 신비한 형상들이 보이는 것이다. 비움의 피안彼岸에 채움이 있는 것이다. 그린 흔적이 없는 표면에도 온갖 그림이 나타나며, 채운 것이 없는 내부에도 흘러내린 유약이 요변을 통해 만든 기이한 형상들이 가득 차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텅 빈 것은 이렇게 고귀하고 영원한 아름다움을 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이 지고至高의 미 앞에서 도대체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누구 이것을 인간의 작품이라 하는가? 그것은 흙이 만들었고土作, 물이 만들었으며水作, 불이 만들었고火作 또 바람이 만들지風作 아니했던가? 아니, 그것을 다 휘저은 조물주의 창작神造이나 장난神戱이 아니던가? 그러니 이제 그 앞에 서라. 온갖 세상욕망으로 채워져 있는 자들은 그의 작품 앞에 서면 비워질 것이요, 갖춘 게 별로 없어 배고픈 자들은 그 앞에 서면 채워질 것이다.

 

 

그것은 질박함과 화려함의 도자다

지당의 도자는 맵시에서는 단순하고 풍기는 멋에서는 질박하다. 일찍이 『한국미술사』(A History of Korean Art)(1929)에서 안드레아스 에크하르트Andreas Eckhardt가 단번에 알아본 것같이 한국미의 중심에는 사방탁자와 같은 목가구들에서도 보이듯이 단순성單純性의 미가 놓여있다. 그러한 단순미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그렇게 강조한바대로 미추美醜를 가리기 이전의 원초적 미요, 무작위적인 아름다움이다. 지당의 도자작품들도 얼핏 보면 단순하다. 생김새도 단순하고, 채색도 단조롭고, 또 혹 그림을 넣는다고 해도 간결하고 조촐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도회의 신사숙녀처럼 세련되고 반드르르한 모습이 아니라 시골의 촌부村夫나 아낙네처럼 편안하고 수더분해 보인다. 그의 모든 작품은 기계로 다듬은 것처럼 매끈하고 단정한 것이 아니라 장인의 손길이 많이 묻어있는 듯 투박하고 거칠어 보인다. 이를테면 고향의 풍경처럼 소박하고, 순박하고, 질박하다.

중국도자가 알록달록 분바른 여인의 모습이요, 일본도자가 예뻐지려고 성형한 여자의 얼굴이라면, 지당선생의 도자는 이른 아침 옹달샘 맑은 물에 세수한 맨얼굴이다. 거기에는 무슨 기교나 장식이 없고, 가식이나 허식이 없다. 자연 그대로의 수수함뿐이다. 사람의 인격도 고매할수록 소박하고 수수하듯, 예술품도 최고의 경지에 이르면 이처럼 단순하고 질박한 것이다. 이러한 단순함과 질박함은 무욕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의 작품의 그러한 질박함은 언제나 맑은 바람百世淸風같은 지당선생의 인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고로 욕망을 덕지덕지 붙이고는 저 자기를 비운 고고함 앞에 감히 서지 말지어다. 하지만 이러한 지당의 도자들이지만 가만히 뜯어보면 볼수록 저절로 경탄이 나오는 화려함이 숨어있다. 그것은 호롱불처럼 소박하지만 아침햇빛처럼 찬연하고, 산골 소처럼 어리숙해 보이지만 거대한 산처럼 당당하고, 산골아낙네처럼 수더분하지만 세상을 흔들만한 숨어있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이다. 요리조리 뜯어보면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도자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황홀해지고 몽롱해진다.

중국도자가 보여주는 오채五彩의 현란함, 일본자기가 드러내는 금채金彩의 화려함은 없어도 좋다. 저 옛날 소크라테스Sokrates의 초라한 용모와 남루한 옷 안에 감춰져 있던 그 빛나던 영혼처럼, 지당의 수더분하고 질박한 작품 안에는 이 세상 어떤 예술미도 겨루기 어려운 찬란한 아름다움이 흐르고 있다. 그의 손길에 불과 바람의 흐름, 신의 손의 어루만짐이 더해져 오채보다 현란하고 금채보다 화려한 고운 선, 영롱한 색, 해맑은 빛깔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의 도자작품의 화려함에는 구체적으로 세 가지 요소가 있는데, 하나는 다양한 색상이요, 두 번째는 요변에서 만들어지는 현란하고 오묘한 무늬요, 세 번째 눈부시게 빛나는 빛깔이다. 흑유나 주동채는 색의 밝은 정도를 뜻하는 명도明度는 낮을지 몰라도 색의 맑은 정도를 보여주는 채도彩度는 최고이다. 그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신기한 색상, 오묘한 형상, 그리고 해맑은 빛깔을 드러낸다. 특히 새로이 나온 그의 분청청채항아리를 보자. 휘종徽宗이 꿈꾸던 ‘비온 후 하늘빛雨過天靑’은 실투유失透釉를 입힌 균요鈞窯청자는 물론 아무리 대만의 국립고궁박물관이 신품神品이라고 자랑을 하며 고려의 비색翡色청자에 근접했다고 말하는 여요汝窯에서 조차도 제대로 발견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맑은 하늘빛이 아니라 흡사 페인트를 칠하듯 유약이 두껍게 입혀진 탁한 청자였고, 실은 하늘색이 아니라 녹색이었던 것이다. 이 북송의 마지막 황제가 꿈꾸었던 하늘빛 청자의 이상은 바로 지당의 분청청채항아리에서 제대로 발견된다. 그의 푸른 항아리는 새가 나르고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만이 아니라 노루들이 뛰노니는 푸른 들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아니 지당의 작품에는 그것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구름지난 후 둥근달雲過滿月’도 그의 백자 달항아리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소위 진사라고 불려왔던 그의 주동채자기들은 또한 어떠한가? 중국도자의 오방색五方色가운데 붉은 색은 검은 혈색黑血色으로 탁한데 비해 지당의 진사도자는 붉은 주동채나 검은 흑동채나 다 맑은 빛이 감돈다. 그것의 화려함은 양반 닭의 벼슬같이 곱기도 하고, 서산 하늘의 저녁노을처럼 황홀하기도 하며, 화산구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용암처럼 대단한 위용을 보이기도 한다. 아니, 지당의 작품 앞에 서노라면 이러한 황홀한 아름다움의 단계를 뛰어넘어 형언하기 어려운 깊은 희열과 평화, 그리고 안식이 다가온다. 그것은 어떤 수사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언표 저편의 신비이다.

누가 그의 백자달항아리를 흙으로 빚었다고 하는가? 그것은 마음으로 빚어진 것이다. 누가 그의 분청다완을 불로 만들었다고 하는가? 그것은 혼으로 태운 것이다. 누가 그의 주동채병에 바람이 스쳤다고 하는가? 그것은 신의 손길이 스친 것이다.

따라서 이번의 지당초대전은 한편으로는 촌부 행색 같은 수수함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왕의 행차 같은 화려함과 위엄이 있다. 그러고 보니 그는 바로 이 시대에 조선관요朝鮮官窯 500년의 역사를 잇는 왕실명장王室名匠 제1호가 아니던가? 그러니 이제 그 앞으로 오라. 초라하여 세상에 나서기 부끄러운 자들은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의연함을 얻을 것이요, 온갖 영예로 분칠하여 화려한 자들은 그 앞에 서면 세상만사 덧없음과 인생이 빈손임을 깨달을 것이다.

 

그것은 차가움과 따스함의 도자다

모든 도자는 차갑다. 도자란 어쩌면 따스한 흙을 차갑게 만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장 뜨거운 불이 차가운 물건을 만드니 오묘할 뿐이다. 옛적에 유행하던 오행五行사상이 무엇을 얘기하든 상관없다. 하지만 경험에 비추어 세상의 갖가지 재료들을 더듬어보면 불, 공기, 흙, 나무는 따뜻하고, 얼음, 물, 돌, 쇠는 차갑다.

목가구는 나무로 만들었으니 그대로 따스한데, 도자기는 따스한 흙이 차가운 형상으로 바뀐 셈이다. 따라서 지당의 도자기도 겉으로는 여전히 차갑다. 그것을 보면 마치 얼음 같은 싸늘함, 칼날 같은 서늘함, 그리고 감성의 치장과 욕망의 부스러기들을 다 걷어내고 남아있는 냉철한 지성의 결정체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누구든지 지당의 항아리를 만나면, 그것이 백자든 분청이든, 흑유든 진사든, 아니 청채든 암각화든 상관없이 보거나 스치지만 말고 안아보아야 한다. 마치 연인을 안듯 안아보고, 자식을 품듯 품어보아야 한다. 그리고 항아리의 고향에서 나오는 풋풋한 흙냄새를 맡고 헐떡이는 흙의 숨소리를 들어보아야 한다. 암울하고 삭막한 이 땅에 엎드려 흙내음을 맡고 흙의 따스함을 미치도록 좋아한 아사카와 다쿠미浅川巧처럼. 나무가 심기고 백자가 나온 이 땅의 흙에 볼을 맞대고 그토록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던 그 ‘백자의 사람’처럼! 아니, 엄마의 품에 안기듯 그것에 안길 수만 있다면 안겨보아야 한다. 아, 그러면 그대는 엄마 품에서 느끼던 따스한 온기를 느낄 것이다.

누가 도자기를 불길로 굽는다고 하는가? 그것은 열정으로 굽고 피로 굽고 생명으로 굽는 것이다. 아니, 그것은 천년세월의 인고忍苦같은 긴 긴 기다림으로 굽는다. 그러면 오랜 산고 끝에 아기가 엄마에게서 태어나는 것같이 옥동자 도자도 만삭한 산모의 배처럼 불룩 솟아오른 흙가마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두운 가마굴에서 끄집어내진 도자는 마치 아기처럼 숨 쉬고 우리에게 눈 맞추고 우리를 향해 미소 짓는 것이다. 그대는 그것에서 맥박이 뛰고 피가 흐르고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도자기 온몸을 타고 도도하게 흐르는 생명의 요동을 온 몸으로 느낄 것이다. 세상에 그것처럼 흥분되고 기쁜 일이 어디 있으랴?

그러면 지당의 도자는 왜 이렇게 따스할까? 그것은 그의 도자들이 그의 신앙과 인격, 그리고 그의 삶을 닮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들을 담아내었기 때문이다. 지당선생은 평생 올곧게 살아오면서도 흔히 그런 사람이 그렇듯 남을 비판하고 칼질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따스한 눈빛과 온화한 가슴을 지닌 분이다. 그가 칼질을 한다면 인간의 인격에 대해서가 아니라, 빚어진 찻사발에 대해서이고 그것에 대해서도 굽부분에 단 세 번만 할 뿐이다. 그러면 지당선생이 왜 그러한 인격을 지녔을까? 그것은 아마 흙과 더불어 평생을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흙을 만지는 모든 도공들이 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덧붙여지는 그 무엇이 하나 더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의 신실한 기독교적 신앙인 것이 분명하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인천 청량산 기슭엔 아담한 백자병 하나를 들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선생의 청동좌상이 세워져 있다. 그 옆의 자연석 기념비에는 그의 글귀하나가 새겨져 있는데, 곧 ‘우리의 미술은 민예적인 것이매, 신앙과 생활과 미술이 분리되어있지 않다’는 구절이다. 그렇다! 지당의 도자는 그의 인격과 삶과 신앙의 종합적 산물이다. 그러하기에 그토록 따스하고 온화하고 사랑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그의 둥근 달항아리를 안으면 흙의 따스함과 지당의 인격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으리라. 그리고 엄마의 품에서 온 몸으로 느낀 그윽한 안식과 평화를 느낄 수 있으리라. 나아가 그런 온기의 저 저변으로 흐르는 신적 은혜의 따스함이 텅 빈 가슴으로 전해져 올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 앞에 머물러라. 그러면 칼처럼 날카롭고 얼음처럼 냉랭한 사람도 인간됨의 훈훈함과 은혜의 따스함을 얻게 될 것이요, 여름태양처럼 늘 정열로 가득찬 이들도 냉철하고 맑은 정신과 올곧은 마음을 얻을 것이다.

 

고로 누가 나더러 한국도자韓國陶瓷의 얼굴을 보여 달라면 나는 서슴없이 지당의 도예작품을 보라 할 것이요, 누가 나더러 한국미韓國美의 산실을 보고 싶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지당선생의 도원요陶元窯로 가라 할 것이며, 그리고 나더러 누가 한국예술의 전시관을 보고 싶다면 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2013년 새봄 서울 변방의 밀알미술관을 찾으라 할 것이다. 이것은 이 땅의 숱한 도자기들과 많은 도요들, 그리고 널린 미술관들 가운데서의 나의 선택이지만 이번 만큼은 어설픈 선택이 아니라 확실한 선택이리라.

천년 전 북송北宋의 수도 개봉開封을 누비던 태평노인太平老人 어디 갔소? 얼른 천하를 혹하게 한 「수중금袖中錦」을 개정하시오. 내부의 술, 단계의 벼루, 낙양의 꽃, 건주의 차, 촉의 비단, 정주의 백자, 절강의 칠기, 그리고 고려의 비색청자가 천하제일인줄 아시오? 아니요. 여기 와 보시오! 당신이 찾던 천하 명품, 신적 물건이 바로 여기 있소!!

 

2013년 춘삼월, 새봄이 오는 소리 들으며 지당志堂 선생의 <불에서 태어난 보석>전2013. 3. 1- 3.31 서울 일원동 밀알미술관에 기쁜 마음으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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