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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7월호 | 특집 ]

학풍의 존재가치
  • 편집부
  • 등록 2013-03-07 17: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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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풍의 존재가치

곽태영 건국대학교 디자인조형대학 공예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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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전공의 위기

학풍의 존재에는 다양한 요소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학풍은 건전해야 회자되기 마련이다.

학풍의 형성에는 시간이 필요하며 그것은 전통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졸업생 동문의 도예 관련 종사자가 풍부해야 학과 전공의 존재 가치가 빛나기 마련이다. 요즘 도예계가 우울하다. 경기의 침체로 판로가 위축되며 어려운 공방운영이 이어지고 있는 종사자가 늘어가고 있다. 대학에서는 전공의 폐지와 통합 등 구조조정의 진행이 빨라지면서 속수무책의 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여러 원인에서 기인하지만 시대적 트렌드에 적응치 못한 학문의 비슷한 경로를 확인해 보면 해답을 엿볼 수 있다. 이미 여러 대학의 도예전공이 폐지되었으며 희한한 고육지책의 학과명칭 개명도 이루어지고 있다. 우선 한자녀 세대로 절대 학생 수가 줄고 있고, 디자인 중심의 운영사고가 악순환을 부르고 있다. 26년을 학교에 종사해온 필자도 그 위기감을 실감하며 그 중심을 걷고 있다. 사실 냉정히 바라보면 디자인 분야의 취업률도 현저히 저하되고 있는 미술. 디자인분야의 위기일 수도 있다. 여러 자녀일 때 한자녀 정도는 예능계에 보냈던 과거와는 분위기가 이미 많이 바뀐 것이다. 학생들과 젊은 세대의 예능에 대한 공감대도 이미 트렌드의 예고와 함께 빠른 속도로 변해 가고 있다. 그런 친구들에게 노동과 요업의 기저가 배인 오래된 미래의 전공은 그 가치와 흥미를 얼마나 열어갈 것인가? 그 생명력은 예술적 가치와 작가적 고뇌, 작가의식으로 숙성될 때 이어질 것이다. 표피적 감성과 디자인적 감각, 마케팅으로만 무장된 디자이너는 점점 그 종사 년 수가 짧아지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의 대학위기는 시대적 속성과 자초된 관성이 빚어낸 비극일 수도 있는 것이다. 전통적 과목을 중심으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끊임없이 변화되고 재미있는 학과의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전과를 목적으로 입학한 친구들이 흙의 매력에 들어 묵묵히 자기의 길을 가는 친구들이 늘어 가고 취업한 친구들과 졸업예정자들의 대학원 진학이 늘고 있는 것은 변화의 조짐을 예고하는 것이다. 흙에는 회귀의 마력이 있다. 공예와 디자인의 그릇된 이분법적 판단은 과거의 전통과 현대의 도가니에서 헤매던 한국도예의 후진성을 부추키고 있는 행위일 뿐이다.

그동안 유행처럼 늘었던 도예전공의 학과가 이번 위기를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고 정리되어지길 소망한다. 늘 위기는 역사위에 존재했다. 한국도예의 찬란한 역사 위에 한 점 위에 서서 르네상스를 위한 진실된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인재는 교수를 닮지 않는다

한국의 도예는 전통적 배경을 중심으로 전후 창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50년에서 2,30년 된 학교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응용미술학과나 공예학과의 복수전공제에서 순수 단일 전공으로 바뀐 시기는 20년 정도 되었다. 학풍이 조성되기에 충분하지도 부족함도 없는 시간이다. 1세대와 1.5세대 교육자들이 정년을 하고 초기의 큰 업적을 남기고 학교를 떠나고 있다. 그 분들은 어려운 환경에서 대학교육을 시작했고, 30대의 젊은 시절부터 한국현대도예의 현장에 교육과 행사현장의 주역으로 머물렀다. 그 노고는 도예전공의 독립과 학과 개설에 큰 업적을 남기며 오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후 한국의 현대도예는 전통과 아카데미즘의 혼돈 속에서 각 대학의 학풍은 오히려 전통도예와 현대도예로 풍을 형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본처럼 학풍을 논하기엔 많은 어려움과 사실 학풍의 존재감이 모호하다. 인재는 교수를 닮지 않는다. 그 교수의 스타일은 하나만 존재하면 되는 것이다. 과거 2세대들 중엔 그 스승을 닮은 작업을 하면서 시대적 감각을 보여준 교육자들이 있었다. 소지가 변변치 않고 유약재료 안료도 부진한 시절, 마치 교복을 입은 비슷한 작품들이 열거되어 왔다. 심한 경우 졸업 작품을 보면서 늘 비슷한 색과 이미지 코드를 보여주곤 했고 지금도 자신의 스타일을 전수하는 교육자들이 있다.

모방은 아마도 졸업작품전과 함께 출발하는 것 같다. 안이한 학생과 나태한 교수의 공모작이 도의적 한계를 벗어나 아마추어로 포장 된 채 학예회 수준으로 나서는 것이다. 공부가 부족하고 수양이 부족한 이들이 시대의 초조함에서 해외잡지와 미디어 정보를 통한 모방은 때론 논문의 인용문처럼 비열함과 뻔뻔스러움 속에 존재해왔다.

인재는 교수의 작품을 닮지 않는다. 작업의 철학은 교육현장의 진솔함과 자신감 그리고 그 작가적 소양과 수준에서 전수되는 것이다. 그래서 교수는 올바르게 초빙되어야 학풍의 가치에 기여하는 것이다. 십여 년 전 까지 작업과 교수직에 대한 논란이 확산되며 전업에 대한 문제가 회자되던 시절 필자는 늘 얘기했었다. 한국의 상황에선 그래도 작업하는 친구들이 교수가 되고 일job을 유지하는 교수들의 작업이 낫다고. 현재를 보라 얼마나 우수한 작업을 하는 젊은 인재들이 많은가? 국내에서 교육을 받았든 유학을 했든, 전통을 현대를 어느 것을 논하든 감동을 주기에 충분한 젊은 작가의 층이 두터워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대학에는 참신한 인재가 영입 되어야 한다.

 

1세대와 1.5세대의 우산을 쓴 2세대의 교육자들은 효도하고 효도 받지 못하는 베이비붐 세대이다. 2세대들에게서 모방이 성행했던 것은 준비되지 못한 철학부재의 세대들이 일부 교직에 종사하면서 대두된 나쁜 행위에 불과하다.

한국에서는 학풍의 존재가치는 교수의 철학과 학문정신 작업의 혼이 튼실할 때 빛나게 된다. 반목하는 집단에는 기대할 학풍이 설 시간도 공간도 없다. 학문의 가치로서 공유하며 서로 존중하며 어떤 이유와 목적에서도 편가르지 않는 집단에서 건전한 학풍은 소생할 것이다. 새로운 트렌드를 가진 젊은 작품에서 모방은 죄악이며 이미 자리에서 도태되고 있다. 일부 유학생 출신 작가들에게서 보여지는 스승계승 모방 작품도 이미 공유되어 스스로 설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학풍은 작가의식처럼 일시에 소유되는 것이 아니다. 치열하고 튼실한 학문정신과 작가의 투혼이 어울려 풍겨나는 것이 작가의 풍처럼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희망은 학교에 있다

작가의 모방의식은 순간적 오판이었어도 죄악이다. 그 교육현장이 건전하고 인큐베이터로 올바르게 존재한다면 사실 그런 모방의 유치한 모습들은 삼류로 추방될 것이다. 요전 인사동 전시에서 필자는 한국도예의 미래를 확인하는 소중한 현장을 목격했었다. 한 대학원의 석박사과정의 전시와 크리틱 현장에서 깊이 있는 토론과 질타 그리고 멘토링이 이어지는 진지한 모습은 모방작의 우려는 물론 우리 도예의 미래를 보여주었다.

과거 본지의 특집-졸업작품전 투고에 소개했던 적이 있다. 2000년도 호주국립대학에서의 졸업작품전은 학부생도 교내 일정공간에서 개인전을 하며 학장과 평론전공 전담 부학장 지도교수 전공교수 타전공교수로 구성된 평가 그룹에게 철저한 검증을 받으며 졸업여부를 결정한다. 당시 한국 대학의 학부에서는 생소했던 현장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낄 수 있었다. 철저한 검증과 반성 그리고 격려를 통한 크리틱은 모방을 막는 시스템은 물론 건전하고 치열한 작가정신을 수임하는 소중한 계기가 될 것이다. 대학원뿐만 아니라 대학의 졸업작품전에서도 진정한 평가와 검증 그리고 전공의 기치를 일깨우는 시간을 갖는 학교가 늘어가길 소망한다. 서로 품앗이하며 벽을 허물고 희망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 소중한 인재를 사장 시키는 우를 범하지 않으며, 학생들에게 필요한 과목이 개발되고 그 과목에 걸 맞는 인재가 초빙되어야 할 것이다. 신선한 자극과 자신감은 비굴한 작가정신을 밀어낼 것이며 우수한 작업이 풍성해 지는 오늘 우려는 불식될 것이다.

 

바라보는 시각을 확장하자

도자기를 만드는 일은 작품을 제작하는 일은 한손에 있다. 도예에는 이미 공업적 생산을 위한 디자인의 존재가 살아 있었다. 공예와 디자인의 시각을 바꾸어야 한다. 공예에는 작가정신과 장인의 치열함이 배어 있다. 도예는 디자인의 시각 판단 보다 휴머니즘. 즉 인간과의 관계성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곳엔 케어의 개념과 새로운 정체성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문화의 현상과 나눔의 공유에서 바라보는 도예는 학교현장에서의 디자인 콤플렉스를 극복하며 더 확장된 시각에서 장소적 사유공간을 확대해 갈 것이다.

기술과 미가 융합된 도예는 디자인과의 조화와 함께 예술적 철학과 작가적 자세가 어울어 질 때 모방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백 프로의 순 창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의 창조는 잠재적 예술적 사유의 오케스트레이션이다. 그러나 모방은 노예적 박제이며 죄악이라는 기본적인 도덕성이 결여된 행위이다. 사고의 통로를 거치지 않은 표현이 모방이다. 소통의 시대 툴의 발전 속도가 생각을 앞선다. 학교에서는 모방을 벗어나기 위해 교수의 연구노력이 배가되어야 한다. 인간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 진정한 예술정신과 자세를 위해 솔선수범해야 한다. 교수 지도집단의 화합과 소통의 척도가 교수 개인적 흥미 분야의 고집으로 학풍을 조성해 가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학풍은 교수와 재학생, 동문 그리고 학교경영자의 의지가 어우러져 나타나는 것이다.

판을 새로 짜는 시기가 다가왔다. 트렌드도 바뀌고 도덕적 판단도 기준이 바뀔 것이다. 학교의 교육현장에서도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다. 지도할 교수의 자질부터 철저히 검증해서 분위기를 바꾸어야 한다. 될 사람이 되어 우수한 인재가 인정될 때 그런 모방행위는 불식 되고 사라질 것이다. 시대적 상황이 바뀌어 간다. 필자가 판단하기엔 작업이 우수하고 진솔하며 교육능력이 검증된, 모방 울타리에 벗어난 인재들이 충분하다. 못된 스승을 닮은 제자 집단은 도태될 것이며 그 스승이 퇴직할 때 흩어지기 마련이다.

젊은 인재들은 스스로 그런 우를 범하진 않으므로 가르치는 사람의 태도와 노력이 중요하다. 늘 숨 돌리지 않고 달리다 보면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오직 목적만을 쫓을 때가 있다. 목적을 위해 타협하며 버릇처럼 모방의 이기를 수용하곤 한다. 과거엔 그런 행위들이 검증되지 않고 전수된 나쁜 시절이 있었다. 이젠 달라진 교육현장에서 스스로의 변화를 추구하며 각자의 개성을 이끄는 건전한 교육들이 젊은 인재들에 의해 수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모방은 작업습관의 좋지 않은 현상이다. 소비자도 학생도 모방행위는 금방 알아보고 더 좋은 것을 찾게 된다. 디지털시대에 불행을 자초하는 모방행위는 커다란 불행을 자초할 뿐이다. 오늘의 학생과 젊은 작가나 종사자들은 생명력 없는 행위보다는 미래가 바쁘기에 건전한 작업을 하기에도 벅찬 실정이다. 열심히 작업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오래 직업으로 종사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성공의 키워드는 분명하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는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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