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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7월호 | 작가 리뷰 ]

Korean American Ceramicist-정민하
  • 편집부
  • 등록 2013-03-07 16:28:46
  • 수정 2013-03-07 16:2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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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American Ceramicist

Sam Chung – 정민하Min-ha Ch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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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연 미국리포터

 

Process: Place/Setting Installation – Greenwich House Pottery

제작과정: 장소(공간)/세팅 인스톨레이션 –그리니치 하우스 포터리

 

 

도예가 샘 정Sam Chung은 한국에서 태어나거나 교육받지는 않았지만, 이민 일세대로 조각으로 석사 학위를 미네소타 대학에서 받은 한국인 아버지와 서예, 묵화로 자기 고장에서 유명했던 증조부(조선 말기, 한일 합방과 일본 강점기)의 영향으로 한국인의 예술적인 기질을 유전적으로 물려받았다. 그는 미국 대학과 대학원에서 도예를 전공하고 노던 미시간 대학과 아리조나 주립대학에서 지난 14 년 간 도예를 가르치고 있다.

최근 그는 <Place/Setting> 전시회에서 그의 자전적 이야기와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유기적인 형태의 용기 「bowl & dish」와 고려청자의 형태가 연상되는 병 모양의 123개의 포슬린 자기들을 선보였다. 세련되고 정제된 유려한 선과 경쾌한 리듬감이 살아있는 형태를 통해 전체적으로 선과 형태의 어울림이 넘치거나 부족하지 않은 우아한 작품들이었다. 다음은 최근 전시의 작가의 말에 소개된 내용과 별도 인터뷰를 통해 그가 직접 언급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Place / Setting에 대해

이 테이블 세팅은 개별 식기를 함께 배치해서 대지의 경관처럼 보이도록 구성되었다. 이 도자 용기들을 이용한 설치작품은 내 자신의 역사와 경험을 반영한다. 스칸디나비아인 선조들이 많은 미네소타 주에서 자란 미국의 한인 2세인 내게 있어서 장소라는 개념은 경험이 시작되는 곳이다. 후에 아시아 전역을 광범위하게 여행했을 때, 나는 친밀함과 이질감을 동시에 포함하는 장소의 이중성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 전시회의 컨셉은 2009년 중반에 시작되어 2011년 3월의 개인전에서 마무리된 것이다. 2005년, 나는 덴마크의 Guldagergaard라는 곳의 도자기 센터에서 레지던트 아티스트로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현대 스칸디나비안 디자인과 로얄코펜하겐의 도자기에서 풍기는 도자기의 시적 단순함에 대해서 익숙한 경외감을 경험했었다.

장소/설정의 개념을 가지고 작업하는 것은 한국 도자기에 대한관심과 연구, 그리고 내 스스로에게 지속적으로 던지는 나는 과연 어디에 속한 것인가라는 호기심에 대한 나만의 접근방식이다. 기본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저녁 식사 테이블을 통해서 물리적 풍경뿐만 아니라 한국과 스칸디나비아 도자기에서 영감을 얻어서 제작한 친밀한 형태에 기반한 교차 문화적 경관과 정체성에 대한 언급이다. 나의 민족적 배경은 한국이지만, 어릴 때에는 스칸디나비아인 선조들을 둔 사람들이 많은 미네소타에서 자랐다. 이번 전시회를 위해서 열여섯 가지의 각각 여섯 조각으로 구성된 독특한 테이블 세팅과 일곱 개의 그릇 그리고 꽃병그룹을 제작했다. 접시와 그릇은 덴마크식 도자기의 현대적이면서 깨끗한 단순함에 영감을 받아 제작했으며, 테이블 중간 영역을 차지하고 꽃병은 한국 전통 양식을 기반으로 했다. 접시들은 포개어 놓음으로써 다양한 지형을 표현하려 했고, 한국식 병은 산과 언덕에서 튀어나온 구름을 의미하도록 배치했다.

 

도자기를 이용한 디너세팅이 자연 경관을 표현하는 것은 그 재료가 흙이라는 점에서 흥미롭게 생각될 수 있다. "장소/설정"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풍광뿐 아니라, 장소라는 것은정체성에 대한 무형의 인지라는 자각이다. 일본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이신 아버지, 중국식당을 운영하는 어머니 아래에서, 스칸디나비안식 가구로 채워져 있는 집에서 자란 나의 어린 시절은 아시아 문화와 미국 문화 사이에서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았다.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명확한 이해는 후에 한국, 중국,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여행을 통해서 생겨나게 되었다. 어떤 장소는 친밀함과 이질감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1993년 한국에 갔을 때, 나는 한국어를 할 수는 없었지만, 어떤 부분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자주 먹는 음식처럼 많은 것들이 자연스러운 반면, 이러한 친숙한 느낌가운데 여전히 나는 외국인이었다. 이번 설치작품에서는 이런 이중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 설치작품에는 특별히 제작된 단단한 스펀지를 이용해서 만들어진 모형으로 123개의 독특한 접시와 그릇, 물레작업으로 제작된 일곱 개의 구름 모양을 묘사하기 위해 변형된 꽃병이 사용되었다.

큰 자작나무 합판 테이블 (8’x12’)은 설치 공간에서 직접 제작되었다. 스칸디나비안 디자인에서 사용되는 자작나무는 깨끗함과 단순함이 뛰어나므로 테이블은 기능적인 측면보다는 저녁 식사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즉, 더 높은 시점에서 도자 식기로 만들어진 지형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좀 낮게 만들어졌다. 설치하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사용되는 테이블이 낮은 한국식 밥상과 유사하다는 사실이었다. 아마도 이것은 이 작품에서 또 다른 이중적 관계, 즉 식기들을 테이블에 설치한 후에 발견한 깨달음 이었다.

 

 

  작품의 제작 과정

디너웨어 테이블 용기 제작을 위해 각각의 접시를 위해 몰드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100개가 넘는 지형들을 닮은 유기적 형상의 접시와 그릇bowl들의 모양을 종이에 그리고 잘라 낸다. 그것들을 패턴으로 이용해 포슬린 흙으로 판 성형을 한 슬랩을 쿠션 등의 완충제로 쓰이는 단단한 1~3인치 두께의 스펀지에 얹어서 기본형을 만든 후에 흙이 어느 정도 굳었을 때 표면과 가장자리를 도구를 이용, 정교하게 마무리를 한다.

주병들은 물레작업 후에 흙이 어느 정도 굳고 유연성이 있을 때 칼로 구름 모양의 형상들을 표면에 그리고 그 모양의 반 정도를 잘라서 앞으로 튀어나오게 한 다음 정확한 크기로 잘려진 슬랩을 이용해서 벌어진 틈을 막고 마무리를 한다. 이것은 마치 옷을 만든는 재단사가 형판(밑본)을 만들고 그것을 이용해 옷을 만드는 과정과 흡사하다.

나는 주로 포셀린을 사용하고 투명 유약을 입히고 가스 가마로 1300’(cone 10)의 고온에서 소성을 한다. 그 후 검정색 차이나 페인트로 서예의 붓놀림을 연상케 하는 윤곽선을 그리고, 약간의 화려한 오렌지, 올리브 그린색상의 차이나 페인트로 색상을 입혀서 전기가마에서 750’C(cone 017)에서 원하는 색감이 나올 때까지 두세 번 더 소성한다.

 

가정과 성장 배경

나의 아버지는 1971년 내가 한 살일 때 미네소타 대학에서 조각으로 MFA학위를 받았다. 그는 내가 기억하기로는 두 개의 매우 다른 종류의 조각 작업을 했던 것 같은데, 한 종류는 여기저기서 모아온 오브제들을 용접해서 만든 ‘정크junk’조각들이었고, 또 다른 한 종류는MFA 학위전시회에서 선보였던 맑은 유리 섬유와 빛을 이용한 매우 깨끗한 작품들이었다. 그는 그 작업을 통해서 선禅 불교의 "무효the Void"을 표현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서울대학교에서 프랑스어로 학사 학위를 받았고, 그 후 1967년에 30대의 나이로 미국에 오셨다.

아버지는 나에게 예술가가 되라고 하셨던 것은 아니지만, 어렸을 때 큰 그림 패드와 파스텔을 사주셨던 것은 기억한다. 당시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을 무척 좋아했고, 아버지는 그런 나를 보면서 무척 기뻐하셨다. 그분께서는 내가 환자들이 고통을 잊고 웃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후에 치과 의사가 되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 어쨌든 흥미롭게도 아버지께서는 MFA 과정을 마치신 후에, 일본문학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시작하심으로 진로를 완전히 바꾸셨다. 이런 아버지의 결정은 내게도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꿈에 대해서 더 심각하게 고민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버지는 결국 일본어 파트타임 교수로 미네소타와 위스콘신에 있는 여러 대학에서 가르치셨는데, 아마도 예술가의 길을 가지 못한 것에 대해서 나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면서 사셨지 않았나 생각한다.

어머니는 이화여대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하셨지만, 미국에 와서는 미네소타 주의 세인트 폴에서 바느질과 옷수선 가게를 시작하셨다. 그녀는 의상이나 커튼 만들기를 아주 좋아했고, 재능이 있으셨는데, 아마도 나는 어머니에게서 손재주를 물려받지 않았나 싶다. 몇 년 후, 부모님께서는 삼촌이 1977년에 오픈한 중국 음식점을 인수하셨는데 그것을 1999년까지 22년간 운영하셨다. 어머니가 실질적으로 식당을 관리하고, 아버지는 주중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주말에는 식당에서 주방일을 하셨다. 너무 바쁘게 일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어서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었던 환경이 어릴 때에는 좋게 생각되지 않았다.

 

나는 대학2학년 때까지는 진지하게 예술가의 길을 걸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형처럼 엔지니어링을 공부했는데, 수학과 과학 과목들은 적성에 맞지 않고, 미술수업이 즐거웠었다. 결국물리학 및 미적분학 등에서 나쁜 성적을 받게 되었는데, 어머니는 내가창조적인 분야에서 재능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후로 예술을 공부하도록 지원해 주셨다. 3학년 때 들었던 도자기 수업에 완전히 매료되었고, 졸업 후에 계속해서 도예를 공부하고 도예가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부모님께서는 도예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일본에 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셨지만, 나는 도제는 되지 않기로 결정했다. 당시 나는 더 많은 자유를 원했고, MFA 과정으로 진학하는 것이 나에게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은 내가 23살이던 1993년에 도예가들을 방문하기 위해서 나를 일본과 당신들의 모국인 한국으로 데려갔었는데, 이전에 한국에 가 본 적이 없었던 내게 그것은 내게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 방문을 통해 한국이 나의 고향임과 동시에 먼 타국임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미국에서 태어나 평생을 성장한 사람이 자신과 닮은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 뛰어들어서, 주위에 있는 많은 것들과 자연스럽게 조화되는 듯하지만, 한국말도 못하고 문화적으로는 동떨어져 있는 모습은 것은 참으로 이상스런 경험이었다. 어쨌든 부산에 있는 친척을 방문하고 광주와 서울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 후 하기Hagi에 있는 몇몇 도예요장을 방문하기 위해 일본에 갔다. 그곳의 도예갤러리 몇 곳의 주인과 연결돼 꽤 많은 유명 도예가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나는 당시, 일본도예를 사랑하기 하지만 문화 거품 같은 느낌이 드는 곳에 살고 공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미국으로 돌아와서 MFA를 마치고 북부미시간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9년 반 동안 한 곳에서 가르친 이후, 10년 전 MFA를 받았던 애리조나 주립 대학교에서 교수로 일을 시작한 뒤 지금까지 재직하고 있다. 나는 현재의 직장을 아주 많이 즐기고 좋아하며, 앞으로도 오랜 동안 여기 있을 것을 기대한다.

 

애리조나 주립대학의 석사시절

1994년부터 3년간 애리조나 주립대학에서 MFA 프로그램에 있을 때 커트Kurt Wiser는 나의 스승이었다. 도자기 그릇에 정통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그는 내가 애리조나 대학을 선택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또한 나는 일본 Mingei로부터 받은 영감을 다른 관점에서 보아줄 사람이 필요했다. Mingei는 미네소타의 많은 도예가들과 교수들에게 미학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고, 나 또한 그 스타일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변화를 갖고 싶었다. 커트의 작품은 내가 익숙한 스타일과는 완전히 달랐는데, 오히려 그런 점이 무척 긍정적인 현상으로 생각되었다. 그는 훌륭한 선생님이었다. 편안하고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예술에 대해서 논하고 접근할 때만은 아주 진지했었다. 나는 그의 지도 아래에서 대학원생으로 있었던 것을 즐겼고, 지금 역시 동료로서 같이 일하는 것이 무척 즐겁다.

 

최근의 디지털 기술에 대해 (필자도 무척 궁금한 질문이었다)

2006년에 개최된 세라믹 식기tableware 대회 Designboom은 옛 동료와 함께 제품 디자인에 대한 공동 프로젝트를 시작하도록 영감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 작업을 통해서 도자기에 사용될 수 있는 디지털 기술에 대해 연구할 기회가 생겼다. 프로젝트에서 우리는 잔과 접시, 컵 두 개와 쟁반 등을 소재로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함께 일했다. 내가 점토로 만든 프로토 타입을 기반으로 동료는 Rhino를 이용해서 3차원모델을 만들고, 결과물을 3D 프린터 (FDM 프로세스)를 사용하여 시제품을 만들었다. 일단 적절한 규모와 모양을 결정하면, CNCComputer Numerical Control를 이용해서 플래스터를 깎아서 금형을 만들었다. 재료를 건드리지 않고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놀랍기도 하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실은 애리조나 주립대학에서도 한국인 교수Dosun Shin가 가르치는 디자인 클래스에서 이 프로세스를 위한 Rhino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Rhino를 이용해서 간단한 컵 형태를 만든 CNC로 가공하는 작업을 배웠는데, 한편으로는 디지털 기술에도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도예가가 직접 재료를 만지고 느끼면서 작업하는 것과, 재료와의 교감이 결여된 채로 디자이너가 작품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대상을 이해하는 방식과 정도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것은 형태, 기능과 디자인을 이해하기 위해재료와 상호작용하면서 얻어지는 ‘Physical Intelligence신체 정보’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점토를 만지면서 하는 작업은 소프트웨어를 이용해서 무언가를 설계하고 결과물이 깎아져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더 즉각적이다. 손을 움직여 흙을 느끼며 작업하고 싶을 때 프로그램을 배우는 데에 많은 시간을 쓰면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디지털 기술이 물건을 만들기 위한 매우 강력한 도구를 제공하는 것은 맞지만, 보다 편리하게 작업하기 위해서는 소프트웨어에 익숙한 사람과 공동 작업을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실제로 대학원생들을 디자인학과 신도선 교수의 학생들과 공동작업을 하도록 했는데, 생각하고 작업하는 방식에 분명한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 서로의 역량에 매료되었다. 중요한 점은 새로운 기술을 그냥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해서 원래의 작업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가 인 것 같다. 기술은 점점 더 자주 사용될 것이고 예술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미 도예 작업에서도 매우 널리 사용되고 있고, 앞으로도 창의성을 발휘하도록 도와주는 유력한 도구로 계속 발전할 것이다. 시간이 날 때에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기반한 프로세스를 다시 이용해서 작업할 것이지만, 현재는 전통적인 방법을 이용한 제작에 주력하고 있다.

 

샘 청은 또한 NCECANational Council of Education for the Ceramic Art, 미국 도자 예술 교육 위원회의 대표 디렉터Director At Large로서 이머징 아티스트, 국제거주 작가 파트너십, 그리고 대학원과의 연대 프로그램에 관여하고 있다. 또한 다른 NCECA위원회에도 참여하고 있는데, 대표 디렉터의 임기는 3년이고 3명이어서, 새로운 대표디렉터가 매년 선출된다. 그의 임기는 2011년부터 2014년까지이다. 그는 엔시카를 통해 해야 할 일이 무척 많지만 상당히 의미있는 서비스라고 생각하고 있다. 과거에 NCECA로부터 받은 많은 혜택을 갚는다는 생각으로 몇 년 전, 출마 권유를 받았을때 흔쾌히 동의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한국 도예. 많은 도예가와 미술사학자들이 무엇이 그 전통을 바탕으로 한 한국의 현대 도예인가를 고민하고 있는 요즈음, 그 질문에 대한 정답을 찾기 위해서 계속 노력해야 할 것이다. 다만 한국인 미국 도예가 샘 청의 작품들이 유럽, 미국, 한국의 도예 시장에서 디자인, 컨셉, 개인적인 심미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결합된 세련된 현대 도예작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면, 이 역시 현대의 한국도예가 가지는 가능한 형태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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