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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월호 | 특집 ]

도자유물 발굴의 역사와 현재
  • 편집부
  • 등록 2013-03-06 14:47:05
  • 수정 2013-03-07 10: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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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유물 발굴의 역사와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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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화 전 이화여대 박물관, 문화재위원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발 딛고 있는 땅의 표면을 벗기면 지나간 시간대를 살던 사람들이 남긴 흔적이 바로 드러난다. 이 땅 밑에 남겨진 옛 사람들의 손길, 숨결과 직면하게 되는 것이 발굴조사이다. 발굴은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찾아내기도 하고 기록되어 있는 역사를 확인하며 새로운 실증자료를 구하는 일이므로 언제나 흥미롭다. 인류 문명의 여명기인 신석기시대부터 첨단과학문명시대인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살던 유적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는 자료의 하나는 도자기이다.

최근 한국 문화유적에서 출토되는 도자기의 종류는 크게 도기陶器와 자기磁器로 분류한다. 도기는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초기 철기시대에 만들어졌던 800℃ 이하에서 소성된 흙그릇 토기土器와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그 생산이 지속되었던 흑회색 경질도기 종류를 모두 포함한다. 이들 도기에는 회유灰油의 유약이 입혀진 흑갈유, 흑유, 녹갈유, 황갈유의 시유도기施油陶器와 옹기도 포함된다. 일반적으로 “자기”는 요업공학적 분류로는 1300℃ 이상의 고온소성으로 태토의 소결상태가 완전 자화된 것을 말하나, 한국도자기에서는 태토가 도기질이어도 장석유長石油계통의 유약을 입힌 1250℃내외 고온소성 도자기를 말한다. 한국도자사에서 도기의 역사는 근 10,000년에 이르고 자기의 역사는 1,200년에 이른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도자기”라고 하면 도기를 제한 자기 종류를 지칭하여왔다. 이글에서도 고려시대에 와서 그 생산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고려청자와 조선분청자, 조선백자 등을 자기로 분류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들을 “도자기”라고 표현하기로 하고 도자기의 발굴역사를 되돌아보기로 한다.

 

고고학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도기와 자기는 시대에 따라 그 형태와 질이 분명하게 구분되기 때문에 유적에서 출토되는 도자기는 유적의 시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고 유적의 성격을 추정하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또한 조성시기가 분명한 토층에서 출토된 도자기 자료는 한국도자기의 발달과 변천의 역사에 편년의 기준자료가 된다. 발굴조사에서는 간혹 한 시대의 사회문화성격, 사상, 미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완성도가 높고 예술적 가치가 월등한 작품이 출현하기도 하기 때문에 발굴은 언제나 보물찾기와 같이 일반인들의 호기심과 관심을 집중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일제강점기시대부터는 일본인들의 관심으로 한국의 고대 도자기를 얻고자 하는 도굴이 부추겨져서 고려청자, 조선 백자등의 도자기는 도굴에 의하여 세상에 드러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학술발굴조사로 밝혀진 자료들이 쌓이면서 한국도자기 역사가 분명하고 풍요롭게 되었으므로 한국도자기 발굴역사를 통하여 한국도자기의 연구방향도 살펴볼 수 있고, 한국도자기의 여러 가지 유형과 제작 기술 및 특성과 미래방향도 탐색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 도자기 발굴의 역사

한국 도자기 연구를 위하여 도자기가마터의 발굴조사를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다. 그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도자기 연구 자료수집을 위한 가마터 발굴조사는 적지 않게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도 청자, 분청사기, 백자 가마터를 발굴조사하면서 한국도자사는 요업 기술의 전개, 수요와 공급 체계 연구로까지 확대되어 갔다. 이러한 조사는 1980년대 이후에 와서 전국의 고속도로 건설, 댐 건설, 공단, 신도시 건설의 개발 현장에서 급격하게 증가하였고, 유적에서 출토되는 도자기의 양도 늘어났다.

특히 도자기 생산 유적인 가마터 발굴조사는 도자기연구에 많은 자료를 제공하기 때문에 가마터 발굴의 역사를 중심으로 도자기 발굴역사를 정리하여 보기로 한다. 가마터 중심의 발굴은 시기별로 네단계를 나누어 그 현황을 보기로 한다.

 

제1기(일제강점기)일제강점기는 국내에서 청자가마터의 발굴조사가 처음 이루어진 시기로 조선총독부 산하의 도자전문연구원이었던 OOOOOOO OOOO野守建 등과 같은 일인학자들이 조사의 주체가 되었던 단계이다. 이때에 이루어진 조사로는 1928년의 강진 계율리 25호, 부안 산내면 진서리 12호의 발굴조사가 있으며 고려 청자가마터 이외에도 공주 학봉리의 분청사기 가마터 조사가 진행된 바 있다. 당시의 조사는 고고학적 층위조사보다도 노출, 유물의 수집이 중심이었다. 이 결과는 다양한 파편의 수집과 가마의 기본구조만 노출시키는 조사였다. 가마와 도자기 폐기물 퇴적의 연관관계를 밝히거나 고고학 층위에 대한 검토가 없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조사결과는 현시점에서는 연구에 활용도가 낮은 편이다.

제2기(1950년대~1970년대)해방과 한국동란 이후 도자기 발굴조사가 처음으로 시작된 곳은 북한지역인 황해남도 평천군 봉암리와 옹진군 은동리의 고려청자가마터에서였다. 그러나 남북분단으로 인하여 이러한 발굴사실은 훨씬 후에야 알려져서 자세한 정보가 없었다. 남한지역에서는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사이에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서 강진의 청자가마터가 조사되었다. 이때에 인천 경서동의 소위 “녹청자” 가마터도 조사되었다. 이들 조사로 고려청자에 고급품과 저급품의 생산지가 다르고, 저급청자류에 “녹청자”라는 개념을 도입하기도 하였다. 이때에는 국립박물관 미술과의 과장이던 최순우 관장이 조사를 주도하여 분청사기, 백자 등, 한국도자기 생산 유적의 주요한 곳을 중심으로 조사하여 주요 요지에 대한 조사가 함께 진행되었다. 즉 광주광역시 충효동의 분청사기 가마터나 경기도 광주의 도마리 백자가마터 조사에 많은 기술적 축적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조사의 정밀성, 다양한 각도의 해석에서는 부족한 면이 없지 않았다. 이 시기에는 고려청자와 조선백자가 출토되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유적의 조사가 거의 없었고 여전히 도굴에 의하여 양질의 청자와 분청자가 간간히 수집되었던 때이다.

제3기(1980년대)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도자기 가마터 발굴조사는 더욱 활발하였다. 이 때의 조사로는 1980년대 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실시한 강진군 용운리 9·10호(4기) 발굴, 원광대학교의 전북 고창군 용계리 요지 발굴, 문화재관리국의 전남 완도군 어두리 해저유물 인양조사, 호암미술관의 용인 서리 고려백자가마터 발굴이 있었고 중부고속도로 건설 예정지에서 경기도 광주군의 조선백자관요터 번천리 가마터가 발굴되면서 최초로 조선관요가마와 공방이 노출되었다. 그 후 광주군 우산리 번천리의 조선시대 중앙관요조사가 계속되어 많은 자료가 수집되었다. 경기도 산본, 전라남도 장성 등의 지방백자 가마터 등의 조사가 증가하여 한국도자사에 많은 자료를 제공하였다. 이들 발굴에서는 가마 구조변화와 퇴적층의 층별 조사가 되어 유물의 속성 분석도 시도되었다. 한편으로는 북한의 황해도 배천군 원산리의 발굴로 순화3년(992년) 명 고려청자 고배가 발견되어 초기 청자의 연구에 많은 정보를 주기도 하였다. 1980년대는 대체로 조사방법과 발굴조사 보고서 작성의 진보를 이룬 시기였어서 한국도자사 연구에 기초자료를 제공하여 연구방향을 예술성에서 기술사, 사회경제사적 연구도 활발하게 되는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자세한 내용은 2012년 8월호 특집기사를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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