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2012.08월호 | 작가 리뷰 ]

이인진 - 토우土宇, 하늘 아래 집
  • 편집부
  • 등록 2013-03-06 14:24:16
  • 수정 2013-03-06 14:24:21
기사수정

이인진 - 토우土宇, 하늘 아래 집_?xml_: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자연에 동화되어 자연에 귀의歸依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인공물

 

지민아 지앤아트스페이스 큐레이터

 

흙이 사람에 의해 특정 형태를 갖추고 1000°C를 웃도는 고온의 불 속에서 구워지고 나면 단단하고 새로운 물체로 거듭나게 된다. 흔히들 도자기ceramic ware’라고 하는 이것은 영속성을 가지기 때문에 부서지고 조각나 그 파편이 모두 흩어지기 전까지는 오래도록 변치 않는 특성을 지닌다. 다시 말해 흙이 불에 구워지는, 어찌 보면 매우 단순·간결한 과정을 거쳤을 뿐인데도 흙 본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운 소지素志의 인공물로 재탄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이 매개한 결과물이면서도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 즉 썩지 않는다는 이 이질적인 특성은 어쩐지 자연스럽다고 하기에는 신비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천연스럽게 자연에 동화, 아니 자연에 귀의歸依하는 도자기가 있다. 작가 이인진이 빚어낸 토우土宇, 일명 흙집이 바로 그것이다.  

이인진은 점토의 순수한 물성에 매료되어 전통적 방식 그대로 흙의 본성을 탐구하는 무척이나 지고지순한 작업을 해온 도예가이다. 현재 홍익대학교 도예유리과 교수로서 후학 교육에 힘쓰고 있는 그이지만, 한 순간도 스스로 연마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경기도 안성의 작은 마을 일죽一竹에 있는 그의 공방에서는 언제나 새로운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리고 그 중 한 작품군이 의 형상을 하고 있다. 얼핏 보면 한국의 전통가옥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국적불명의 오묘한 이인진의 집이 보인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지붕 형식만 보아도 전통 기와지붕과 처마의 형태를 갖고 있거나 서구적 박공牔栱 지붕의 형태인 것 등 다양하다. 여기 저기 풍채 좋게 뚫려 있는 창문은 어떤가? 현대 사회의 고층건물의 그것도 있고, 높은 구릉 올곧은 터에 자리하고 있을 법한 고즈넉한 정자亭子를 연상시키는 것, 나무 잎사귀를 닮은 것마저도 있다. 이 모두 도예가 이인진의 남다른 인생의 색이 들어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1]

그에게 있어서 흙은, 물과 바람은, 그리고 불은 자연에 가장 자연스럽게 다가가게 하는 기재이다. 특히 도예의 바탕이 되는 흙earth은 만물이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대자연처럼 그가 모든 것을 포용하는 도예가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 목적이 예술이건 실용이건 간에 태토胎土 지니는 속성을 거스르지 않고 사람의 삶이 그것에 담기도록 차분하고 진득하게, 때로는 대범하게 작품 성형成形을 한다. 이때 그의 숙련된 손은 마음의 충실한 도구가 된다. 건조가 충분히 진행되면 그제서야 이 등장하는데, 길게는 7일간 짧게는 하루를 꼬박 장작가마에 불을 지핀다.[2] 흙과 불을 만지는 예술인 도자예술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이 소성의 단계에 이르면 그의 태도는 마치 아이를 어르듯이 조심스러워 진다. 가마불 속의 흙덩어리들은 자궁 안의 태아처럼 적시에 공급되는 양분인 장작들에 의해 천천히 완결에 이르러야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흙이 일으키는 사건event에 그저 동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또한 오랜 시간이 흘러 얻어진 완숙함으로 마침내 참여의 희열을 맞볼 수 있게 된 것이리라.

 

이인진의 토우도 그렇게 탄생되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제작되어온 이 일련의 오브제들은 이라는 형상의 동질성을 공유하기는 하지만 어느 것 하나 같은 것이 없으며, 그 모습 그대로 자연으로, 흙으로 되돌아 간다. 도자기의 특성상 용도가 있을 법도 한데 작가가 말하는 이것은 ’, 더도 덜도 아닌 으로, 어떤 흙이 어떤 인연으로 불을 또 그를 만나 이곳에 있게 된 것일 따름이었다. 이 집들은 가마에서 구워져 나와 땅 위 하늘 아래에 놓여 십여 년 이상 오래도록 우직하게 그 자리를 지킨다. 그러나 이를 둘러싼 자연은 삶과 죽음을 반복하며 변화하고 태생이 같은 그 집을 포용하며 자신과 동화시킨다. 흥미롭게도 이인진의 집은 이렇게 나이를 먹어가고 있었다. 초목은 집을 부드럽게 감싸고 자라나며, 올록볼록 이끼가 피어난다. 때로는 쌓인 먼지가 비에 씻겨 내려가고, 처마 아래 벌집이 열리고, 건너 논두렁의 청개구리가 별장 삼아 머무르다 간다. 어느덧 소인小人들이 그곳에 터전을 잡고 그들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토우는 그냥 그저 그렇게 그곳에 존재함으로써 진정한 완결에 서서히 다가서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집들이 자연에 동화해가는 과정을 관조하는 감상자의 시선에 담백한 정겨움이 묻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집은 무의미한 것으로 의미를 찾는 순리대로의 삶이 영위營爲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표상이자 그 실천이다. 이 집의 형태는 사람의 집이지만 사람을 비워내고 만물을 향해 열려있는 그런 집임과 동시에 너그럽게도 우리 또한 그 안으로 초대함으로써 온 자연을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지붕마저 환하게 창이 뚫려 내리는 눈비에까지 자신을 내어주는 갸륵함에 우리의 본성이 공명共鳴하고 탄복歎服할 때가 바로 정이 이는 순간이다.

 

세월을 따라 농익는 이인진의 작품세계, 뿐만 아니라 작품 토우는 이제 본래 있던 장소일죽의 작가 공방를 떠나 이곳 지앤아트스페이스의 내외 전시장을 메우고 있다. 속절없이 강제이주를 당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 불던 바람이 이곳에도 찾아올 것을 알기에, 이곳에도 땅이 있고 하늘이 있음을 알기에 단절된 것은 없다. 흙 지붕이 품었던 하늘과 흙 벽이 지지했던 땅을 되새기며 잠시간이지만 이곳에 머무를 동안의 흥취興趣에 넋을 놓고 자연에 동화되어 우리를 맞이하는 토우을 바라다보는 것은 어떨까.


 

0
비담은 도재상_사이드배너
설봉초벌_사이드배너
산청도예초벌전시장_사이드배너
월간세라믹스
전시더보기
작가더보기
대호단양CC
대호알프스톤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