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을 담다 Holding the Void
-절묘히 기능적이고, 다분히 철학적인-
방창현 도예가
진정한 발견의 항해는 새로운 땅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보는 데 있다. _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조각가의 미망
도자 조각가는 언제나 컵에 대한 미망迷妄에 시달린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조각스러운 컵을 만들지 못하는, 아니 시도하다 결국 뒤돌아서고 마는 그 무능에 대한 회한과 아쉬움이다. 나의 생각에 이의를 제기할 조각가들도 있겠지만 최소한 내가 만나본 도자 조각가들은 주로 그런 미망에 시달렸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는 미국 유학 시절부터 좀 더 본격적으로 ‘조각가의 컵’을 만드는 일에 골몰했었다. 내가 만든 컵으로 물을 마시고, 컵을 만지면서 흐뭇해할 수 있는 그런 컵을 꼭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예와 디자인 그리고 조각이라는 서로 다른 분야에서 흘러나온 생각과 편견들이 컵을 만드는 일을 썩 불편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아주 생경한 컵이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드는, 급기야 다시 쓰레기통에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반복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꼭 그 일을 실현하고 싶었다. 나는 조각적인 사고와 공예적인 기능성,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 하나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절묘히 기능적이고, 다분히 철학적인’이란 모토motto로 나는 ‘조각가의 컵’을 만드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간 다른 전시로 인해 컵을 만드는 일이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지긴 했지만 나는 5년 동안 아이디어 개발과 기술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해왔다. 그리고 이번 개인전에서 조각가의 컵과 주전자, 그리고 조명을 많은 사람들에게 선보일 수 있게 되어 감회가 남다르다. 사실 돼지조각만 만들던 조각가가 컵을 만드는, 그것도 당당하게 개인전의 형식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것은 남다른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미루면 영원히 나는 ‘조각가의 컵’을 만들 수 없다는 결연한 각오가 있었다. 나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서 누군가의 눈치를 보기보다는 나와 나의 컵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결과와 반응은 잘 모를 일이다.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부담감도 많이 덜 수 있었다.
‘비움’을 담다
‘비움을 담다’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이번 전시의 주제는 다분히 동양적 미학에 기초를 하고 있다. 여기서 ‘비움’이란 기존의 컵이 가지는 기능성 이외에 다른 의미를 더할 수 있는 하나의 ‘존재태’라고 설명하면 좀 현학적인 표현일지 모른다. 채우기 위해 만든 ‘용기vessel´의 기본적인 용도 이외에 나는 나에게 익숙한 대상이 어떤 다른 콘텍스context 속에서 새로운 지각을 경험하게 하는 그 시간과 공간을 ’비움‘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므로 ’비움‘은 역설의 수사rhetoric이자 새로운 미적 체험을 하게 만드는 창조의 에너지이다. 용기에 대한 서양의 접근법이 채움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파지티브 스페이스positive space에 집중되어 있다면, 나의 접근법은 끊임없이 비움네가티브 스페이스negative space을 생성하는 역설의 미학인 것이다.
작품의 조형요소 1. 사물의 뒷면 -양각된 글자
아연판에 글자를 새긴다. 아연판은 나의 육필을 고스란히 음각시키는 부드러운 금속이다. 음각된 글자를 지닌 아연판의 뒷면을 보면 양각되어 새로운 조형미를 드러내는 새로운 글자들과 조우한다. 이것은 마치 사물의 뒷면에 존재하는 낯설고도 신비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 같다. 나는 이 세계를 컵으로 담아보고자 했다. 글자가 새겨진 아연판을 제단해서 컵모양을 만든 후에 석고로 캐스팅한다. 석고는 잃어버린 시간과 공간(미적 체험)을 고스란히 자신의 틀 안에 화석화시키는 놀라운 재료적 성질을 지니고 있다. 나의 육필에서 느껴지는 ‘나’라는 흔적이 지니는 ‘존재감’과 양각되어 다시 사물의 새로운 뒷모습을 보여주는 ‘신비감’은 나의 컵의 가장 중요한 미적인 요소다.
작품의 조형요소 2. 가벼움
아연판을 캐스팅한 석고틀에 흙물을 붓는다. 흙물이 석고틀 속에 있는 시간을 최소화시켜 컵의 두께를 가능한 얇게 만든다. 그리고 하루동안 건조시키면 석고틀에서 이탈한 작은 컵이 자신의 원시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가마 속에서 굽기 전까지 이 컵은 매우 약해서 극히 조심히 다루어야한다. 가마에서 나온 컵은 종이처럼 얇고, 마치 중력을 거부하는 듯한 가벼움을 지닌다. 이 가벼움은 관객들에게 새로운 미적 체험의 기회를 제공한다. 종이 위에 쓰여진 글씨, 하지만 이것은 종이가 아니라 흙이다. 이 역설적인 물성이 지니는 매력은 오랫동안 나를 이 스튜디오에 머물게 한 동인이다.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작품의 조형요소 3. 빛과 투광성
컵은 1300도의 고온의 세례를 받은 후에 태어난다. 이 고온을 거치면서 컵은 경질의 자기처럼 단단하게 화석화된다. 얇고 가벼운 종이의 물성을 지닌 이 컵은 다소 어두운 곳에 두면 자신의 성질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나는 양초나 LED 전구를 컵 속에 넣거나 컵 밑바닥에서 비춘다. 빛이 나의 컵을 투광하자마자 마치 고대의 퇴락한 문서에 적힌 암호같은 글자들과 마주친다. 빛이라는 환경이 주어지지 않으면 나의 컵은 단순히 가벼운 컵이라는 물건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고대의 시간과 그 시원의 공간을 체험하게 만드는 ‘빛’은 나의 작품에서 중요한 조형적 요소이다.
작품의 조형요소 4. 실용성
컵에 양각으로 새겨진 무수한 글자들은 컵의 기능성을 시험하기 전에 시각과 촉각의 호기심을 유발시킨다. 하지만 눈으로만 보기엔 무언가 석연치 않은 면이 있다. 컵의 쓰임은 음료를 담은 컵의 입술과 사람의 입술의 교감을 통해 극대화된다. 나는 언제나 컵의 근본적인 ‘실용성’이라는 큰 틀의 안에서 가능한 최대의 조형적 요소를 표현하기 위한 방법들을 연구해왔다. 실용성이란 이렇듯 촉각적이다. 인간의 몸과 사물과의 촉각적 교감, 이것이 실용성을 설명하는 최적의 언어가 될 것이다.
작품의 조형요소 5. 탈문맥화De-contextualization
컵 위에 양각된 글자들은 자신의 의미(sick whore, 아픈 창녀, mother, 슬프다 나는)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도 있고, 거꾸로 양각되어서 의미를 드러내지 않고 하나의 기호적인 이미지만 지닌 것도 있다. 주전자에 새겨진 ‘아픈 창녀’라는 텍스트는 틀림없이 자신의 사전적 의미를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하지만 시나 소설의 텍스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런 종류의 글자가 주전자의 몸통에 박혀 생경한 상황을 연출한다. 이것이 탈문맥화De-contextualization다. 문맥과 상황이 맞지 않음. ‘주전자’와 ‘창녀’는 도대체 무슨 관계란 말인가? 이것은 기존의 단순한 주전자가 가지는 기능성과 획일성에 던지는 조용한 조각적인 반란이다. 작은 컵에 드러나는 단어 ‘mother´은 다소 온건하고 감상적인 상황을 만든다. 어머니에 대한 각기 다른 개인의 의미를 이 컵을 만져보면서 생각할 수 있으면 하고 만들어 본 것이다.
작품의 조형요소 6. 트롱프 뢰이유Trompe-l´œil
나의 작품 전반에 흐르는 가장 중요한 조형원리는 트롱프 뢰이유(시각적인 환영을 유도하는 눈속임)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종이로 만든 것 같아!”라는 반응을 얻기 위해서 나의 컵은 흙의 물리성 속성을 전혀 드러내고 않고 종이의 물리적 속성을 극대화해서 보여준다. 흙이 종이의 물리적 속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수년간의 기술적인 실험과 경험이 필요했다. 흙이 종이로 변환되는 과정 속에서 시적이고 몽환적 이미지들이 생성된다. 이것이 새로이 생성되는 비움이고, 비움은 다른 조형요소들과의 삼투渗透과정 속에서 그의 존재성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