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민 Lee Jong Min
하얀 감성을 세공하는 기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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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진 본지기자
조선을 지칭하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1885년에 출판된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이라는 책에서 비롯됐다. 작가 이종민(00)의 작품을 보면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표현이 무심결에 떠오른다. 조선백자를 연상시키는 하얀 백자 위에 보일 듯 말듯 세밀한 문양들은 형태의 아름다운 선과 함께 어우러져 엄숙한 고요함이 느껴진다. 전통의 미 위에 현대적 감성을 새기는 작가는, 눈에 띄는 화려함이 아닌 작품 심연에서 흘러나오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미美, 그 자체를 추구하다
조선백자와 같이 담담한 듯 존재하는 이종민의 작품은 언뜻 보면 평범한 백자작품 같지만 다가가면 화려한 문양의 향연이 펼쳐져 있다. 그것은 하나의 반전이며 아이러니한 느낌을 동시에 준다. 한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용성을 거부하는 듯 한 작은 구멍을 발견 할 수 있다. 도자기지만 도자기로 쓸 수 없는 작품이기에 예술품으로서의 가치가 이중적으로 강조된다. ‘보석과도 같이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작가의 말대로 작품은 보여지는 아름다움으로 인해 사람들로 하여금 소유의 욕구를 자극한다. 주로 음각으로 새겨진 문양들은 아르누보 영향을 받아 화려하고 장식적이다. 나무 이파리, 강가의 모래톱의 형상 또는 바람의 흐름을 연상시키는 문양은 자연물에서 이미지를 채집하는 아르누보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그럼에도 조선백자의 미가 흐트러지지 않은 이유는 작품 속 문양이 나타내기보다 숨김으로써 존재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작품에 전체적으로 흐르는 선은 그가 어렸을 적부터 수없이 보고 자란 동양화 속의 정적인 선을 닮아있다.
동양미술품 속에 자란 어린시절
이종민의 어린시절은 전통도자기와 한국화 등 고미술품들과 항상 함께였다. 그의 아버지는 동양미술작품 수집가였다. 따라서 미술, 특히 동양미술은 삶처럼 매우 자연스럽고 친근한 것이었다. 한번은 아버지가 아끼시던 도자기를 형과 함께 깨뜨리고 말았는데, 아버지의 호통이 무서워 급히 밥풀로 그 파편들을 붙여놓고 시치미를 떼었다고 한다. 결국 들통이 났지만 오히려 정교하게 붙여놓은 아들의 손재주에 감탄했다는 일화가 있다. 작가는 타고난 손재주로 미대에 진학하고자 했지만, 집안의 반대로 공과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결국 적성에 맞지 않았던 학과를 그만두고, 늦은 나이에 중앙대학교 공예학과에 입학했다. 인생의 진로를 바꾸는 결심을 하게 된 직접적인 영향은 우연히 보게 된 아르누보의 대표적인 프랑스 세공사 르네 라릭Rene Lalique 1860~1945의 작품 때문이었다. 르네 라릭은 금, 은, 상아, 호박 등을 이용해 곤충과 동물, 식물 등 자연에서 받은 영감을 주제로 정교한 장신구를 제작한 천재적인 공예가였다. 르네 라릭의 작품을 본 그는 아르누보 스타일에 매혹돼 관련 장르의 책을 모으며 금속공예에 관심을 갖게 됐다. 당연히 금속을 전공하리라 생각하던 그는 결국 흙을 선택하게 됐다. 그는 “흙의 부드러우면서 시간에 의해 강해지는 물성이 흥미로웠고, 또 불에 의해 변화하고 작품이 완성되는 과정이 재미있었습니다. 또 그런 점이 저의 묵묵한 성향과 잘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고 말한다. 물레를 돌릴 때의 안정감도 매력을 느낀 부분이다. 그는 홀로 물레 앞에 앉아 작품을 만들다보면 종교의 자아수련과도 같이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고 한다.
아름다움을 위한 치열한 과정들
이종민의 작품은 대부분 물레작업으로 만들어진다. 동양적 미감을 살린 형태의 작품은 주둥이가 작은 편인데, 앞서 말했듯 보여지는 도자기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결국 ‘기’의 영역을 다소 벗어나 그 자체만으로도 기능 할 수 있는 오브제적 도자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성형이 끝나면 드로잉 구상을 먼저 한 뒤, 주작업인 조각을 시작한다. 양각도 시도하지만 은근한 아름다움을 추구하기에 음각을 더 선호한다. 자연의 형상을 딴 섬세한 문양들은 그의 손을 거쳐 치열하게 작품 안에 담겨진다. 때론 더 섬세하게 조각을 하기 위해 반 건조와 건조 됐을 때 두 부분으로 나눠 아주 천천히 오랫동안 조각을 한다. 그가 이렇게 조각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보석들이 치열한 과정을 거쳐 깎이고 다듬어져 아름다워지듯, 흙 작업 또한 노력의 과정을 거쳐야 진정한 아름다움이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공예는 타 예술분야와 달리 장인의 영역이 있습니다. 나의 감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기술을 익혀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공예가를 ‘감성을 표현하는 기술자’라고 생각합니다.”고 말한다.
무모할 정도로 적극적인 작품홍보의 성과들
현재 이종민의 작품 홍보 및 전시기획은 부인 최흔씨가 도맡아서 하고 있다. 미술을 전공했기에 남편의 작품세계를 누구보다 잘 이해해주는 그는 가장 좋은 조력자다. 2011년 12월 첫 개인전<바람에 그리다> 2011.12.21~12.26 갤러리 이즈을 끝낸 뒤 처음 작품홍보를 시작할 무렵, 작품을 어떻게 알릴까 많은 고민을 했다. 그러던 중 부부는 무작정 프랑스에 작품 세 점을 들고 날아가 파리에 위치한 공예갤러리들을 찾아다녔다. 여행경비는 최소한으로 줄이고 통역인을 고용해 작품을 큐레이터들에게 직접 소개하고 전시를 요청했다. 거절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작품을 알리고자하는 마음이 더 컸다. 결국 그 당시 직접적인 성과는 얻지 못했지만, 그것을 기회로 2012년 6월 프랑스에서 단체전을 열게 됐다. 파리의 Galerie Etienne causan에서 열린 전시에서 생각보다 많은 작품이 팔리면서 가능성을 보게 됐다. 또한 2012년 3월 한국에서 열린 리빙페어에 참가해, 8월 독일의 Messe Frankfurt에서 개최한
모두가 공감하는 아름다움을 위해
이종민이 처음 백자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단순하고 오묘한 빛깔 그리고 은은한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그에게 백색의 흙은 마치 하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싶듯, 만들고자 하는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또한 르네 라릭을 통해 알게 된 아르누보는 곡선을 이용한 화려한 장식성으로 그가 추구하는 진귀한 보석과도 같은 작품의 이미지를 표현하기에 잘 맞았다. 즉 동양적 미와 서양적 미를 절묘하게 결합, 동서양을 떠나 모든 사람이 보기에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제 작품을 보고 자극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연 본연의 편안한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고, 조금이라도 심적 치유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전한다. 앞으로도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빛나는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싶다고 말하는 작가 이종민. 그의 작품은 시시각각 변하는 네온사인 같은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명상과도 같은 고요함 속에 멈춰져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