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예술지원금 나는 이렇게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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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웅 | 도예가
예술지원금 받기에 고수는 없다
예술지원금에 관한 온갖 자료들을 검색하며, 한 겨울 작업실 난방비와 후에 있을 전시의 상충된 고민 속에서 넘쳐 오르는 에너지의 방향성을 잡고자 하는 이들이 상상된다. 필자 또한 지금도 그러하고 처음 예술지원금을 알게 되었을 당시도 그러했다. 자신의 앞가림도 힘든 선배에게 후배들이 ‘어찌 살아야 합니까?’ 물어 올 때 술자리에서야 불굴의 의지에 관한 이야기로 밤을 지새웠겠지만 본 지면에서는 조금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예술 지원금의 고수는 아님을 밝혀둔다. 이유인즉, 아직도 아르코(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시각예술분야에서는 한 번도 지원받은 적이 없다. 다만 국제교류분야에서 네 차례 정도 지원을 받은 것이 이 원고청탁의 이유가 된 것 같다.
필자의 예술지원프로그램의 시작동기는 전시판매 여부와 상관없이 창의적인 전시의 모색에서 시작되었는데 전시관련 시각예술분야에선 아직도 못 받았으니 처음 예술지원을 받고자 하는 이들과 같은 과정에 있는 것이다. 결국, 이 기고는 노하우가 풍부한 작가의 정보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컴퓨터에 쌓여 가는 각종 지원서의 폴더와 공모시즌이 돌아 올 쯤 되면 밤을 지새우며 현실의 탈출구를 찾았던 필자의 이야기가 될 것을 말해 두고 싶다.
한국에서 비행기타고 잘(?) 나가는 작가
오로지 전시의 작품판매를 통한 수입만이 전체 수입원이 되었을 당시 필자는 언제나 전시를 앞두고 전전긍긍 하였다. 초대전시든 대관전이든 전시작품의 평가와 상관없이 전시판매 수입이 없이는 갤러리도, 필자에게도 힘든 상황이 눈앞에 펼쳐 질 것은 당연했다. 방편으로 사람들이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찻그릇류와 오브제를 함께 내어 놓음으로써 금전적 리스크를 줄일 수가 있었지만 언제나 전시 주제 의도와 디스플레이는 그 성과를 다 하지 못하는 역설적 상황의 반복이었다.
‘한번 만이라도 돈 생각 없이 전시를 하면 아니 되나?’ 미치도록 필자를 괴롭히던 그때쯤 방안으로 생각한 것이 예술지원 프로그램이 아닌가 싶다.
예술지원을 먼저 받은 주변 작가들이 제작과정과 전시에서 오롯이 자신의 생각을 펼쳐내는 전시들이 그 동기가 되었다. 그들이 국민의 혈세를 낭비치 않고 프로그램의 취지에 맞게 활동력과 완성도 높은 작품성을 내어 놓은 결과를 보아온 필자로서는 놓칠 수 없는 과정이었다.
인터넷을 검색하고 선정된 작가의 기획안을 꼼꼼히 살피며, 주변의 큐레이터를 괴롭혀 얻어낸 첫 계획서는 비록 시각분야에서는 선정되지 못하였으나, 국제교류분야에 선정이 되어 외국에서의 활동 영역을 넓힐 수 있게 되었다.
첫 지원은 폴란드의 도예가 친구 미하우부치니스키와의 약속(폴란드에 한국의 통가마를 만들자!)을 한국, 폴란드 도예교류 워크샾으로 실현되었다. 당시 ‘루브라도 통가마’라는 한글 현판을 걸었을 때 그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이 생생하다. 이후 루브라도 통가마는 개인적으로는 지구 반대편의 유럽 땅에 한국의 작은 고장을 만든 듯 한 착각의 장소가 되었고, 폴란드 현지에서는 매년 국제도예워크샾을 치뤄내며 당시의 지원금과 수고가 빛을 발하고 있으니 첫 미션은 그럭저럭 잘 마친 것 같다. 이 후 두 번의 교류전과 심포지엄 참가, 그리고 외국에서의 첫 개인전까지 치루게 됨으로서 국가지원으로 비행기 타고 잘(?)나가는 작가가 되었으니 은근히 자신감이 붙었다. 본인의 자신감이 꼴불견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외국에 나가 언어가 약해 고독한 작업의 시간들을 보내며 자신의 내면에 충실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보고, 느끼고, 한국을 전할 수 있는 교류의 목적성 또한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을 보면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자세한 내용은 2013년 1월호 특집기사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