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그릇 이야기
어린 시절, 늦은 시간 귀가하시는 아버지를 위해 밥그릇을 따로 구별해서 드실 밥을 담아두었던 기억
이 있다. 그 밥그릇은 보온을 위해 아랫목 따뜻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가장의 늦은 귀가 시간 때
문이기도 했지만 특히 할머니의 준엄한 명령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이불 위로 유난히 볼록 올라온
모습이 어느 누구의 그것보다도 크고 높아만 보였다. 간혹 추운 겨울 꽁꽁 언 발로 뛰어 들어와 이불
속에 밀어 넣다 봉분 같은 아버지 밥그릇이 쓰러지는 날엔 할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 구별된 밥
그릇은 언제나 아버지만 사용할 수 있었다. 가끔씩 아버지가 남긴 밥이 있어도 그곳에 내 수저를 넣
어 먹을 수는 없었다. 밥을 들어내 다른 밥그릇으로 옮겨 먹어야 했다. 그만큼 철저히 구별된 밥그릇
이었다. 어느날 아버지의 밥그릇을 내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다. 방학 숙제로 태극기 그리
기를 할 때였다. 자꾸만 일그러지는 원에 속이 차질 않아 끙끙대고 있는 막내 아들놈이 보기 딱했던
지, 밥그릇을 들고 오게 하셨다. 아들의 조막손을 잡고 사뭇 진지하게 도화지 한가운데 엎어놓은 밥
그릇 둘레를 따라 원을 그려냈다. 대보름달 같이 완벽한 원이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본인의 집 식탁 그릇은 어떨까? 아쉽게도 더 이상 권위있는 가장을 위한 뚜껑
이 있는 큼지막한 밥그릇과 묵직한 놋수저는 온데간데 없다. 오히려 구별되고 있는 밥그릇은 아들놈
의 그릇이다. 한 살배기 때, 던져도 깨지지 않을 만큼 강도 높고, 두꺼운 도자기 그릇을 아는 도예가
에게 부탁해 특별히 주문, 제작해 쓰기 시작한 것이 유일하게 다른 식구들과 구분된 그릇이 된 것이
다. 그 외 다른 식구들은 그릇과 숟가락을 사이좋게 공유하고 있다.
몇 달 전 일본 큐슈의 한 도자기 마을을 찾은 일이 있다. 우연히 들른 도자기 상점에 하굣길의 한 초
등학생이 가방을 멘 채 들어와 밥그릇 하나를 꺼내 주인에게 건내고 다른 그릇을 골라 바꿔가는 장
면을 보았다. 주인에게 연유를 물으니 몇일 전 부모님이 사다주신 아이의 밥그릇인데 마음에 들지 않
아 직접 바꿔간 것이라는 대답이다. 일본의 가정에서는 가족 전원이 자신의 밥그릇과 젓가락, 찻잔
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아버지의 그릇과 젓가락으로 어머니가 밥을 먹는 일이 없
고, 아버지가 아이의 그릇과 젓가락으로 먹는 일도 없다. 그 이유는 식기를 손에 들어 음식을 입으
로 옮기는 편이 먹기 쉽고, 따라서 남녀 각각 다른 크기의 식기를 준비하는 문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범접할 수 없는 가장의 권위를 거스르지 못해 아버지의 그릇에 숟가락을 넣지 못한 것과는 사뭇 다
른 이유다. 일본인들의 가족 간에 구별된 그릇에 대한 애착을 경험한 후, 우리집 식구들의 식기를 바
꿔 보고자 마음먹었지만 아직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있다. 다만 유일하게 아들놈 전용 그릇만 네
개나 된다. 둘은 국내에서 특수 주문 제작된 그릇이고, 다른 둘은 일본 초등학생의 모습에 자극받아
사온 고양이와 부엉이 그림의 그릇이다.
김태완 월간도예 편집장 anthos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