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희 본지기자
작가 여병욱(42)은 단일한 색채와 단순한 형태면서 특유의 상상력이 담긴 오브제로의 성격이 돋보이는 작업을 추구한다. 그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자연스러운 선의 흐름은 마치 전통 한옥의 처마를 연상케 하듯 독특한 미감을 선사한다. 동시대의 아름다움을 찾아 오랜 시간 실험적인 자세로 자신만의 조형세계를 만들어 가는 그를 만나기 위해 서울시 마포구 연남동에 위치한 작업실을 찾았다.
도예와의 인연
1989년 단국대학교 도예학과 입학 당시 여병욱은 흙 작업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더욱이 수석으로 입학까지 한터라 주변의 기대치는 높았지만 대학생활에 대한 회의 때문에 1년간 학업과는 담을 쌓고 지냈다. 그가 본격적으로 작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같은 해 겨울 학교를 자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외각에 위치한 고바다케 공방에서 석판화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다. 3개월간 판화를 배우며 작업에 흥미를 가지게 된 그는 일본 도쿄 고다이라시에 위치한 무시시노미술대에 진학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국내에서 몇 년간 일본어 학원을 다녔기에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고 실기시험 또한 한국과 같은 석고 뎃생이었기에 입시에 대한 큰 어려움 없었다. 1991년 3월 공예공업디자인과에 무난히 합격을 했고 학부생 4년, 석사과정 2년 동안 흙 작업에 매진했다. 1997년 석사과정을 마친 후 한국으로 돌아와 홍대 인근에 작은 작업실을 마련했다. 우선 자신의 작업 스타일을 찾기 위해 유약실험에 몰두했다. 수십 종의 유약데이터를 만들어냈고 그중 3년간 연구해 완성한 동유 계열의 푸른색 유약을 작업에 주로 사용했다. 하지만 동을 사용한 이 유약은 제작과정에서 실패율이 많아 까다로웠다. 뜨거운 가마에서 쉽게 녹아내리는 특성 때문에 기물은 상판에 들러붙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가마앞에서 주저앉아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렵게 완성한 유약이었지만 다루기가 힘들고 또 비슷한 색감의 동유 계열이 다른 작가들에 의해 많이 쓰이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유약을 연구하게 됐다. 여러 차례 고배를 마신 후 결국 철 성분을 주재료로 한 매트한 진갈색의 유약을 완성할 수 있었고 이 유약을 자신의 전시 작품에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첫 개인전은 2008년 일본 나고야의 필 아트 갤러리feel art zeo gallery에서 가졌다. 첫 전시였지만 당시 관람객들의 반응은 예상외로 좋았다. “한국 어느 지역의 도자기인가?” 또는 “처음 보는 도예작업”이라는 관심을 받으며 관람객들의 호응을 얻었다. 첫 전시에서 거의 모든 작품을 판매한 그는 이후 필 아트 갤러리feel art zeo gallery와 도쿄의 유후쿠 갤러리yufuku gallery, 오사카의 syo 갤러리syo gallery와 연결돼 1년에 두 번씩 지속적으로 초대 개인전을 펼쳐나갔다. 일본에서의 활동을 발판으로 영국 런던 사치갤러리saatchi gallery의 소속작가로 2010년과 2011년 ‘Collect’전에 연속 참여해 작가로서의 입지를 다져나갔다. 전시를 선보일 때마다 작품은 늘 70%이상이 판매될 정도로 관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특히 첫 전시에서 그의 작품을 눈여겨본 유후쿠 갤러리의 관계자는 그에게 갤러리 전속 작가로서의 활동을 제의했다. 도쿄 도심에 위치한 유후쿠 갤러리는 도자전문갤러리로써 현재 15명의 국내외 전속 도예가들을 보유하고 있어 일본 미술계 안에서도 손꼽는 곳이다. 제의를 받아들인 그는 이후 유후쿠갤러리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전업 작가로서 본격적인 길을 걷게 됐다.
실험과 반복, 상상력이 만들어낸 독특한 미감
여병욱은 지난 9월 한국에서 자신의 첫 개인전을 선보였다. ‘Silence’라는 주제로 서울 가회동에 위치한 이도갤러리에서 전시를 가졌다. 전시의 주제처럼 어두운 작품의 색감은 고요함과 적막함으로 전시공간을 압도했고, 작품이 지닌 수려한 선의 아름다움은 관객들에게 상상속에서 물결치는 리듬감과 같은 몽환적인 분위기마저 선사했다. 작품들은 언뜻 보기에 단조롭게 반복돼 엇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각의 개성이 확실하며 작품표면의 텍스쳐들도 다양하다.
여병욱의 작품에는 전통과 현대미, 그만의 상상력이 더해진 독특함이 담겨있다. 숨죽이며 작품을 뚫어져라 응시하다 보면 작품 속 마티에르가 드러나 보인다. 전통 옹기의 표면을 연상케 하고 회화적 요소에 가까운 유연한 선들은 마치 먼 산의 능선을 떠올리게 한다. 그가 만들어낸 작품의 선은 풍만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전통 조선백자의 수려함과 닮은 듯 하지만 또 다른 미감도 지닌다. 특히 녹슨 금속과 같은 색감은 작가 특유의 실험적 욕구로 표현된 것이다. 실제로 그의 집 안 곳곳에는 철도 제작에 쓰이는 거대한 볼트와 너트, 청계천 상가에서 구입한 빛바랜 골동품, 달아서 색감이 벗겨진 나무 조각상 등 작가적 감성을 자극할 만한 오래된 물건들이 진열돼 있다.
그의 작업 과정을 살펴보면 얼마나 다양한 실험과 시도, 반복을 통한 표현연구에 몰두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오랜 시간 작품을 건조한 후 초, 재벌 외에도 중온과 저온에서 여러차례 번조하는 과정을 거친다. 또한 붉은 흙이나 황토 등을 덧발라 불 속에서 흙이 녹아내리기전 안착하는 온도로 한번 더 번조한다. 이후 표면의 질감이 자연스럽게 베어나오도록 사포로 손질하고 기름이나 옻칠을 바른 후 저온에서 또 다시 번조한다. 번조를 위한 준비재료 또한 만만치 않다. 얇은 흙판이 높은 온도에서 휘어지는 것을 방지하고 원하는 선을 살리기 위해 작품보다 두세 배는 큰 기물 받침대를 흙으로 제작한다. 녹록치 않은 준비과정과 반복된 실험, 번조 끝에 작품이 완성된다.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얻어진 결과물이 진정한 작품이라 생각한다”며 “남들과는 다른 새로운 작업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노련함보다는 부지런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일부 내용이 생략됩니다. 월간도예 2011.10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