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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9월호 | 뉴스단신 ]

현대미술의 7가지 키워드와 함께 떠나는 방창현의 세계도자기행(18)
  • 편집부
  • 등록 2011-11-30 11:41:46
  • 수정 2011-11-30 14:5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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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현대미술의 중요한 키워드인 숭고the sublime, 몸body, 미니멀리즘minimalism, 물성materiality, 서사narrative, 개념미술conceptual art, 팝아트pop art를 중심으로 본 현대도예 비평의 글이다. 하지만 형식면에서는 기행문적 수필의 형식을 빌어 독자들이 현대 도예 담론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졌다. 한국의 현대도예가 오랜 동면의 시기를 지나 이제 찬란했던 옛 영화를 위한 용트림을 하는 이 시기에 한국 현대도예의 미래 비전과 현재의 성찰을 제시하는 글이 될 것이다.

 

물질, 몽상, 데쟈뷰deja vu   
열여덟 번째 작가: 라파엘 페레즈 페르난데스RAFAEL PEREZ FERNANDEZ,
제프리 칼러Jeffrey Kaller, 토마스 슈미트Thomas Schmidt

 

흙은 지상에 존재하는 물질로 형이하학적 존재이다. 흙은 물질의 4원소地水火風-흙, 물, 공기, 불에 등장하는 첫 번째 물질로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서양 철학자뿐만 아니라 동양의 사상가들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물질의 근원적 요소들 중 하나이다. 이 수동적인 형이하학적인 물질은 물이나 바람과 만나면 자신의 몸을 움직여 어디론가 부유한다. 끊임없이 타자에 의해 자신의 위치와 존재감이 결정되는 이 미약한 존재는 타자를 부리는 일 없이 쌓이거나, 쓸려가거나, 날리기를 반복한다. 흙이 영겁의 시간 속에서 다른 흙을 만나 흩어지고, 나뒹굴고, 뭉쳐지고, 다져지고, 밟혀지고, 퇴적되면 ‘대지’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다른 이물질을 만나서 화학반응을 거치고 나면 익명의 ‘암석’으로 태어나기도 한다.
흙은 개별적인 인식이 불가능한 집합적 존재이기 때문에 단순한 물질이 지니는 견고함이나 한계성을 지니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흙은 하나의 ‘유니트unit’의 개념으로 이루어진 다른 물질과는 달리 새로이 만나는 타자와의 관계성에 의해서 그것의 의미나 이미지가 결정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흙을 가두어 둘 수도 흙을 논리적으로 정의할 수도 없다. 흙은 육안으로 감지하기 힘든 작고 미세한 먼지의 형태로 어린 아이의 머릿결에 내려앉기도 하고, 인간이 거주하는 거대한 도시 아래서 그 가열한 현존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 흙이 지니는 현존성은 언제나 ‘부존’의 다른 이름이다. 흙은 존재하는 듯 하면서도 그의 존재성을 잘 감지하기 힘든 물리적 성격 때문에, 흙이 지니는 부존성은 ‘존재론적 부존’이기 보다는 ‘인식론적 부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흙이 물과 결합되면 점토라는 가소성可塑性을 지닌 새로운 물질이 되어 집을 만들거나, 지상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형상을 모방한 조각물로도 만들어진다. 하지만 흙의 다른 물질과의 상호 공존성은 언제나 취약한데, 특히 물이나 바람과 이루어진 관계에서는 타자와의 취약한 관계성을 극명히 드러낸다. 이것은 흙의 회귀적 성질 때문이다. 흙의 회귀적 성질은 수분이 사라진 흙을 다시 메마른 흙으로 되돌리거나, 대지 위에서 바람을 만나 다시 어디론가 사라지게 만든다. 흙의 이러한 형이상학적 성질은 언제나 인간에게 친숙하게 다가와서 그의 부피와 촉감으로 대변되는 물리적 성질을 칭송받지만, 그 물리적 존재성이 쇠락하는 지점에 도달하면 우리는 흙의 ‘추상성’과 대면하게 된다. 그 추상성은 흙이 가지는 물리적인 의미를 넘어선, 즉 형이상학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간이역에서 마주치는 흙에 관한 ‘이미지 혹은 몽상’이 존재하는 내밀한 시공간을 연출한다.

흙은 지상에 존재하는 물질로 형이상학적 존재이다. 흙은 인간의 역사와 민족의 혼을 어루만지는 질료이다. 흙은 한 민족이 수 백, 수 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생명의 터전이자, 그 역사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물리적인 존재를 넘어서는 형이상학성을 지니고 있다. 흙은 ‘땅’이나 ‘영토’와 같은 민족성을 드러내는 말로 쉽게 전이되어 쓰이면서 하나의 소유적인 개념으로 전락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흙을 통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생각하거나, 새로 태어날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기도 한다. 모든 생명은 흙 속에서 배태되어, 흙 위에서 그 생명을 일구고, 다시 흙으로 되돌아 갈 준비를 한다. 그러므로 흙은 만물이 소생하는 근원이자, 만물이 돌아가야 할 궁극의 귀거래歸去來인 것이다. 그리고 흙은 인간의 문명의 이루어 놓은 병리현상을 치유해 시원의 순수함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흙은 간살맞은 인간의 이성과 졸렬한 몸의 욕망을 언제나 자정시키는 놀라운 치유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 능력은 흙이 다른 물질처럼 형이상학적인 성질만 지니고 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흙은 언제나 텅 비어 있지만, 또한 모든 것을 품어 안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 흙의 물성을 이용해서 흙의 비밀을 유린해내는 세 명의 현대 도예가를 만나러 나는 버스에 오른다. 스페인 라마다 갤러리에 전시 중인 세 명의 작가들은 라파엘 페레즈 페르난데스RAFAEL PEREZ FERNANDEZ, 미국 출신의 도예가 제프리 칼러Jeffrey Kaller와 토마스 슈미트Thomas Schmidt이다. 현대미술에서 이미 그 수명이 다해 보이는, 어쩌면 아직도 구태의연한 작업방식으로 인식되는 재료의 물성을 이용하는 작가들이 현대 도예계에서 아직도 두터운 작가층을 형성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흙이 ‘물과 불과 공기’이라는 다른 원소들과의 결합으로 나타날 수 있는 새로운 형상의 가능성이 아직도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버스는 거대한 해성층이 융기되어 드러난 단층의 속살을 사면으로 마주한 도로를 끝없이 달린다. 정지된 시간 속에 고요히 태고의 숨소리를 간직한 리오 노구라 리바고카나Rio Noguera Ribagorcana를 지나, 나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도예가 라파엘 페르난데스RAFAEL PEREZ FERNANDEZ의 작품을 보러 마드리드로 가는 중이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주라기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한 이 퇴적층은 어느 순간 전혀 낯설지 않은 장면으로 바뀐다. 분명 이 곳은 내게 너무나도 친숙했던 공간의 기억과 느낌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스페인과 나의 인연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진이나, 영상물에서도 나의 스페인에 관한 자료를 지금까지 모은 적이 없었다. 그 유명하다는 스페인 출신의 화가 피카소와 미로조차 나의 기억에 제대로 된 정보가 저장되어있지 않았다. 이 데자뷔Le deja vu, 기시감의 감정은 도대체 어디서 생긴 것일까? 도무지 이 낯선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다. 버스 차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분명 나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틀림없이 나의 삶 속에 너무나도 오랫동안 자리하고 있었던 풍경이었다.
내가 전생에 스페인에서 태어난 것일까? 전생이란 것이 과연 있기라도 한 것일까? 이 거대한 흙이 만들어내는 퇴적층과 기암괴석들은 어김없이 나에게 갖가지 몽상에 잠기게 한다. 그러던 중에 나는 책 속에서 우연히 플라톤의 말을 마주친다. “우리는 과거에 저 세상에서 진리를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 세상으로 올 때 망각의 강을 건너면서 누구나 그 물을 마시기 때문에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진리를 배우는 것은 과거에 본 것을 하나하나 상기하는 과정이다."<1> 너무 오래전 사람이 쓴 책이라, 현실적으로 잘 다가오지 않지만, 어쨌던 나는 버스 속에서 쓸데없는 몽상으로 협소한 공간의 불편함을 상쇄시켰다.

갤러리에 들어서자 라파엘 페레즈RAFAEL PEREZ의 작품들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동시대의 현대도예 작가들 중에서 흙의 물성을 이용해 작품을 만드는 도예가들은 많지만, 라파엘의 작품처럼 독특한 느낌을 주는 작가도 찾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작품에서 느껴진 처음의 그 독특함과 생경함은 점차 어디에서 본 듯한 데자뷰의 감정으로 전이되었다. 그것은 다른 작가의 작품을 모방하거나 비슷한 시각적 언어를 이용한데서 오는 그런 익숙함이 아니었다. 나는 이 정체불명의 ‘기시감’을 분석하느라 분주했다. 도대체 흙의 물성을 이용하는 작가들의 작품 앞에 서면, 나는 왜 이토록 언어로 정의할 수 없는 어떤 미묘한 감정과 조우하는 것일까? 나는 한동안 이 작가의 작품에 대한 나의 글이 좀처럼 말을 들어먹지 않음을 느꼈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송두리째 전복시켜 현대인들의 문명과 속도와는 전혀 무관한 세계에 살고 있는 듯 보이는 라파엘의 작품 앞에 무엇을 분석한다거나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듯 보였다. 이미 교육된 언어로, 보편적 인식체계로 접근할 수 없는 그 언어 위의 언어가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라파엘의 작업실을 찾아가, 그가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나 지켜보며 한 줄기 빛을 발견하기만을 기대했다. 하지만 나는 끝내 글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라파엘의 작품 앞에 찬란한 문명의 구조물인 ‘언어’는 무망無望한 일임을 깨닫는 것이 유일한 수확이었다.
라파엘은 작품을 만들 때 백색 자기 흙과 검은색 토기 흙을 주로 쓴다. 토기 흙이 가마에서 구워지는 적정 온도는 보통 1050도이다. 하지만 라파엘은 자신의 작품을 1300도 가까이 소성한다. 소성과정에서 흙은 부풀어 오르거나 팽창하면서 예측할 수 없는 효과를 만들어 낸다. 전시된 작품들 속에는 마치 화산이 폭발한 뒤 용암이 흘러내리는 양태를 한 것도 있었고, 대지가 융기되어 만들어진 단층과 습곡의 내밀한 속살을 드러낸 것도 있었다. 라파엘의 작품은 한결같이 고고학적인 표정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라파엘은 자신의 작업은 우연적인 요소가 많지만, 결코 자연스러운 풍경만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것은 가마 속에서 발생하는 우연적인 과정 속에서 자신이 흙에서 느낀 가장 친밀한 이미지를 가진 작품을 선별하기 때문이었다.
라파엘은 자신이 작품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자신과 관객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시각적인 깊이를 가진 작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기존의 조형원리에서 전혀 찾을 수 없는 시각적 요소를 발견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기시감’을 이용한 독특한 접근법과 관련된 듯 보였다. 어쩌면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태고적부터 존재해 왔던 풍경이 고스란히 퇴적되어 있는지 모를 일이다. 그 풍경은 유전적 사슬에 의해 세대를 통해서 이어지고, 무의식 속에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다가, 한 예술가의 영매靈媒적인 퍼포먼스를 통해 작품이라는 결과물로 현현되는 것은 아닐까? 이런 면들을 들추어 볼 때 앞에서 언급한 플라톤의 이야기는 충분히 근거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페레즈의 독특한 작업 방식은 이미 10여 년 전에 그에게 스페인의 대표적인 도예가로서의 명성을 안겨다 주었다. 페레즈는 자신의 예술을 ‘도예’에만 한정시키지 않았다. 그는 동시대에 ‘도예’를 한다는 것은 물리학과 화학에 대한 탐구일 뿐만 아니라, 고고학과 현대미학이라는 다양한 학문적 통섭의 과정이라고 말했다. 흙은 작품에서 부인할 수 없는 중요한 재료이지만, 페레즈는 자신이 이용하는 흙에 페인팅과 조각, 그리고 퍼포먼스와의 경계를 넘나들 만큼 그 의미를 다양하게 부여했다. 현대미술의 역사와 이론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이 점을 깊이 인지해야만 할 것 이다. 연금술적인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은 다른 재료를 이용하는 예술가들과는 다른 ‘과정적 퍼포먼스’가 현저하게 존재함을,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세기의 예술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미학으로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타진해야 할 것이다. 과정적 퍼포먼스는 주시하듯이 작품을 소성하기 전에 가마 앞에서 가마신kiln god에게 예를 올리는 ‘원시적 제례의식’과 가마 소성과정에서 가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과 열의 향연’, 무엇보다 예측할 수 없는 작품의 결과물이 가마에서 잘 나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작가의 심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대미술의 시각에서 ‘도예작품’을 하나의 공예적인 결과물로만 취급하는 것은 도예의 진면목을 간과하는 행위일 것이다.  

 

일부 내용이 생략됩니다. 월간도예 2011.09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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