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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7월호 | 뉴스단신 ]

현대미술의 7가지 키워드와 함께 떠나는 방창현의 세계도자기행(16)
  • 편집부
  • 등록 2011-09-05 11:4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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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몰락의 서사
  • 열여섯 번째 작가: 안드레아 키스 코넬Andrea Keys Connell, 미스티 갬블Misty Gamble, 데이비드 퍼만David Furman

이 글은 현대미술의 중요한 키워드인 숭고the sublime, 몸body, 미니멀리즘minimalism, 물성materiality, 서사narrative, 개념미술conceptual art, 팝아트pop art를 중심으로 본 현대도예 비평의 글이다. 하지만 형식면에서는 기행문적 수필의 형식을 빌어 독자들이 현대 도예 담론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졌다. 한국의 현대도예가 오랜 동면의 시기를 지나 이제 찬란했던 옛 영화를 위한 용트림을 하는 이 시기에 한국 현대도예의 미래 비젼과 현재의 성찰을 제시하는 글이 될 것이다.

 

몰락의 서사   
열여섯 번째 작가: 안드레아 키스 코넬Andrea Keys Connell, 미스티 갬블Misty Gamble, 데이비드 퍼만David Furman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면 달리 살 줄 모르는 사람들을.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면 달리 살 줄 모르는 사람들을.” 니체의 이 언설에 나의 청춘은 일찌감치 예술가의 길을 예감했다. 몰락의 사연은 몰락한 자가 지닐 수 있는 유일한 가치였지만, 그 가치가 직접적으로 소통될 수 있는 세상은 어디에도 없는 듯했다. 이곳의 날씨도 너무 나빴다. 하지만 난 여기를 떠날 수 없었다. 
예술은 불가피했다. 예술은 비루한 자, 몰락한 자, 혹은 이곳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합법적인 행위였다. 예술이 없었다면 이 지구는 훨씬 더 가벼워졌을 것이고(예술을 하지 못한 사람들의 요절로) 세상은 더욱 소란스러워졌을 것이다(예술로 승화시키지 못한 사람들의 광기로). 예술 속의 몰락은 파멸을 의미하지 않았다. 예술가들의 몰락은 빛을 지니고 있었고, 그들의 영혼은 밤하늘의 별처럼 아스라이 정주민들의 가슴에 담겨졌다. 저 북유럽의 예술가 고흐, 쉴레, 뭉크의 몰락의 사연이 그러했던 것처럼 예술가들의 울림은 경계를 초월하고 이념을 넘어섰다. 세계의 사각死角에서 기생하던 몰락의 사연은 이렇게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등진 세상과 화려한 공생을 하게 되었다. 국가는 광기어린 예술가들을 감금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예술가들에게 붓 한 자루만 주어진다면, 그들은 울음을 멈추고 자신의 광기를 조용히 화폭에 옮겨 놓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예술가들의 몰락의 사연을 들으러 가기 위해 다시 길 위에 서있다. 불혹지년에 이르도록 ‘지금, 여기’의 현재성이 지니는 황홀한 현존의 아름다움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내가 이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된 것이다. 이렇게 타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고요해진 내 마음의 신비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어쩌면 나를 구원한 것은 나의 이야기가 예술로 승화하는 과정에서 만난 ‘흙’이라는 질료의 신비한 치유력 때문은 아니었을까?

아리조나주 경계를 넘어 나는 지금 미국의 뉴 멕시코 주에 있는 산타페 갤러리Santa Fe Clay Gallery에 가고 있다. 이번 전시에 초대되어진 작가는 세계적으로 조명을 받고 있는 도자 구상 조각가들이다. 그들 중에서 나는 유난히 안드레아 키스 코넬Andrea Keys Connell, 미스티 갬블Misty Gamble, 그리고 데이비드 퍼만David Furman의 작품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들 작품의 공통분모는 모더니즘의 미술의 사생아로 버림받았다가 20세기 후반에 다시 당당히 현대 미술의 베뉴venue로 들어온 이야기하기, 즉 ‘네러티브Narrative, 서사’라는 장르로 귀결될 수 있을 것이다. ‘너무 설명적이다’, 혹은 ‘너무 직설적이다’라는 단편적인 미니멀리즘의 시각에 반세기 동안 고요히 숨죽이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없었던 그 ‘네러티브’를 구가하는 작가들을 만나러 간다.  

네러티브Narrative는 20세기 후반에 시각예술과 문학에서 주목받은 하나의 예술 양식이었지만, 그 기원은 민요, 설화, 민담, 신화 등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부터 하나의 이야기로 존재했던 모든 양식을 나타내는 말이다. 네러티브는 할아버지가 들려주던 구전동화와 같은 구어적인 형식이나, 고대 동굴벽화의 주술적인 그림과 중세의 성화와 같은 시각언어로도 존재해왔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네러티브’는 인간의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표현의 욕망이자, 삶의 존재 방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세기에 이르러 상징주의 회화와 표현주의 작품들 속에서도 네러티브적인 요소들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귀스타프 모로, 퓌비 드 샤반느, 오딜롱 르동과 같은 상징주의 화가나, 뭉크, 쉴레, 크림트와 같은 표현주의 화가들은 회화와 조각을 시각적인 문제로 보지 않고 사고의 문제로 인식했고, 산과 들에서 주제를 찾는 대신에 다른 동료들과 문학, 철학, 신화등의 열띤 논쟁을 통해서 자신의 작품의 주제를 더욱 공고히 했다.1) 이 과정에서 작가들은 신화적 이야기나 자신의 이야기들을 작품의 중요한 주제로 등장시켰다. 하지만, 네러티브를 통해 외부세계의 이야기와 그 이미지를 모방해 온 서양 미술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2)의 모더니즘 시대’에 다다르자 문학적 주제와 네러티브를 일관되게 제거하기 시작했다.3) 대상과 사물의 구상적 표현이나 인간의 감정을 드러내는 네러티브적 표현은 ‘저급한’ 혹은 ‘낮은 단계의’ 예술로 취급된 것이다. 이 모더니스트들은 인간의 감정이나 이야기하기적 표현보다는 물질 자체와 형태에 집착했고, 외부세계에 대한 의미부여 대신 내면세계로 더 깊이 침잠해 들어갔다.
하지만 서양 미술사에서 영원히 사라질 뻔 한 네러티브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극적으로 부활하게 된다. 미술을 인간의 삶에서 근본적으로 분리시켰던 모더니즘의 미술에 대한 반발로 인간의 삶(고통, 성, 폭력, 인권, 환경, 대중문화) 자체를 주제로 삼았던 포스트모더니즘의 아티스트들은 구상적인 형태와 네러티브적 구조로 작품을 형상화했다. 이로써 네러티브는 20세기 후반과 21세기에 가장 중요한 예술장르로 그 의미를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20세기 후기에 한국의 예술가 백남준의 기치로 시작된 비디오 아트는 작품 속에 시간성과 이야기를 접목시킴으로써 네러티브의 위상을 더욱 강화시켰다.4)
현대 도예가들에게 나타나는 네러티브의 양식은 좀더 문학적 네러티브에 가깝다. “서사란 하나의 이야기, 즉 시간적 연쇄로 이루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이야기한다.”5) 라고 언급한 비평가 스티븐 코헨의 말처럼, 현대 네러티브 도예작가들의 작품은 한편의 연극을 보듯 작품의 한 장면이 다른 한 장면과 내용적으로 연결되어 관객들에게 또 다른 시각적인 흥미를 유발시킨다. 이 네러티브 작가들은 작품을 위한 시나리오도 직접 쓸 수 있을 만큼 문학적인 소양을 중요시하기도 했다.  
세계 현대 도자조각에서 네러티브 작가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21세기의 시대적 특성과 맞물려 있다. 21세기의 네러티브는 엔터테인먼트의 산업의 발달과 함께 우리들의 일상 속에 깊이 침투해있다. 더군다나 텔레비전이나 스마트폰에서 쏟아내는 영화와 뉴스, 드라마, 에니메이션은 모두 새로운 이야기들로 무장해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네러티브’는 이젠 21세기 문화에 핵심적인 화두가 된 것이고, 예술가들은 새로운 네러티브를 끊임없이 창조하지 않으면 관객들에게 쉽게 외면을 받게 되는 큰 중압감에 시달리게 된다. 
멀리서 안드레아 키스 코넬Andrea Keys Connell의 작품이 보인다. 안드레아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퀭한 눈을 가지고 있다. 그 퀭한 눈은 영혼을 도난당한 자들의 것이다. 영혼을 도난당한 자의 몸은 어디론가 도망치듯이 동물적인 움직임으로 그 긴박한 순간들을 드러낸다. 몸의 일부는 과감하게 생략되어 긴장감을 더 해준다. 그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존귀함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이성과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야수의 세계에  오로지 ‘힘의 법칙’에 의해 먹고 먹히는 금수들의 야성의 울부짖음이 공명이 되어 전시장에 가득히 울린다.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장면, 이것은 영화속에서나 나오는 우리의 현실적인 삶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일까? 아니면 우리의 삶이 아비규환의 연속은 아닐까?
갑자기 안드레아가 2009년 오하이오 대학Ohio University에 가진 졸업전시가 생각났다. 금발에 벽안의 눈동자를 가진, 너무나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던 안드레아가 삶이 처참히 무너진 자들을 조각하고 있는 모습은 아이러니 그 자체였다. 그녀의 겉모습에서는 그 어떤 슬픔과 상처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드레아는 작품 앞에서 자신의 과거를 조용히 관객들에게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것은 안드레아의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였다. 안드레아의 할머니는 홀로코스트6)의 생존자였다. 할머니가 겪었던 그 엄청난 트라우마는 어머니로 이어졌고, 어머니의 트라우마는 다시 안드레아까지 내려왔다. 대학살은 끝났지만, 지울 수 없는 정신적인 상처는 세대를 관통해서 이어져오고 있었다. 안드레아는 그것을 ‘세대 간의 정신적 외상intergenerational trauma’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할머니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그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지만, 안드레아는 어릴 때 탱크나 총소리가 자신의 꿈에 자주 나타났다고 고백했다.
안드레아는 인간들의 삶이 가장 처참히 몰락하는 순간을 포착해서 실물 크기의 작품으로 가감없이 표현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한 개인의 역사가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과 행동에 영향을 주는 지에 깊이 천착해왔다. 무엇보다 무의식 속에 침잠된 그 깊은 트라우마가 어떻게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지 심리학적인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각형의 건조물은 어른들의 집단 정체성을 상징하는 ‘사회주의자 동상Social Realist Monuments’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고, 그 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아이들의 순수함을 상징하는 후멜 인형Hummel Figurines7)에서 영향을 받았다. 안드레아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전쟁과 상처, 그리고 인간애를 표현한다. 작품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전해지는 그 깊은 비애감은 우리의 삶에서 잊혀진 하지만 영원히 사라질 수 없는 인간의 동물적 ‘야만성’에 대한 깊은 경각심을 관객들에게 전해준다.
안드레아 키스 코넬Andrea Keys Connell의 최근의 작품은 ‘세대 간의 정신적 외상intergenerational trauma’에 관한 좀더 깊이 있는 연구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안드레아는 영웅주의의 전형의 인물인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헤라클레스Hercules와 폭력에 대한 그의 영웅적 관계를 고찰함으로써 인간의 보편적인 트라우마의 의미를 되짚어 보려했다. 그녀는 헤라클라스의 이야기를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미지로 변화시켰다. 안드레아는 ‘헤라클레스를 찾아서, The Pursuit of Hercules’라는 타이틀에 맞추어서 시나리오를 작성한 후에 자신의 작품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첫 번째 장면은 광기에 휩싸여 헤라클레스가 자신의 아이를 죽이는 장면. 두 번째 장면은 참회를 하면서 열 두 개의 열두 가지 노역勞役을 행하는 장면. 세 번째는 열 두 개의 노역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죄를 씻고 불사의 몸을 가진 영웅으로 거듭나는 장면이다. 아직 진행 중인 이 시리즈는 안드레아가 지금까지 연구해온 주제의 결정판이 될 것이다.
미스티 갬블Misty Gamble의 작품이 보인다. 육체적으로는 성숙하지만 단정하지 못한 행동을 하고 있는 여인들은 처음보기에도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대상이다. 흔히 ‘왕따’를 쉽게 당할 수 있는 보편적인 행동을 모르는 이 미숙한 여인들은 과연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 사회의 규율과 법칙을 철저히 외면하는 듯한 이 여인들의 제스츄어는 관객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일까? 미스티는 자신의 작품에 관해 한참동안 너스레를 떤다.
미스티 갬블의 아버지는 유명한 꼭두각시 인형극 감독이었다. 미스티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세계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꼭두각시 인형극의 도우미를 했었다. 특히 1998년 이란에서 열린 ‘세계 인형극 페스티발7th International Puppet Festival in Tehran’에 초대될 만큼 아버지는 성공적인 꼭두각시 인형극 공연자였다. 작가의 이런 경험은 그녀의 작품에서 중요한 모티프로서 작용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 꼭두각시의 단원으로 살아온 삶이 가져다주는 자유분방한 삶과 거침없는 행동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미스티가 어느 순간 자신의 행동과 사고방식이 정착민들에게는 너무나 무례하고 비정상적인 행위로 비춰져 온 것임을 인식하게 된 것일까? 미스티는 일련의 작품시리즈 ‘Chapel, Bid Hair, Sweet Terror’에 등장하는 익살스럽지만 풍자적인 인물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전통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보여지는 여성적인 아름다움과 사회의 기대감에 대한 도전적인 작품들을 통해서 작가는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도덕이고, 과연 미의 기준은 무엇인가’란 질문들을 관객들에게 던진다. 
최근작에서 미스티는 아이와 어른의 경계가 희미한 세계에서 살고 있는 실물크기의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는 아이들의 제스쳐와 표정을 탐구해왔다. “이 노숙한 아이들의 얼굴은 기괴하고 또한 아름답다거나 달콤하거나 무시무시합니다. 이 아이들은 죄를 지을 기회가 주어질 때 순수함의 개념에 도전합니다. 사회의 도덕과 규범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부족으로, 이 아이들은 과장된 감정적인 상태를 표현합니다.” 미스티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언급을 간략히 마무리 지었다. ‘얼빠진 영혼 단장시키기, Primping the vacuous soul’ 라고 언급했던 미국 도예비평가 낸시 설비스Nancy M. Servis의 말처럼 미스티는 인간의 고유한 주체성을 무시한 채 천편일률적인 ‘보편성’을 강요하는 사회의 모순과 폭력성에 길들여진 우리들의 무의식적인 사고에 일침을 가한다. 

 

일부 내용이 생략됩니다. 월간도예 2011.07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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