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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6월호 | 뉴스단신 ]

아사카와 타쿠미淺川巧 탄생 120년 기념
  • 편집부
  • 등록 2011-08-29 10:49:14
  • 수정 2011-08-29 11: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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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伯敎 타쿠미淺川巧 형제의 마음과 눈 - 조선시대의 미美 ①

2011. 4. 9~ 7.24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특별전

 

정은진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학예원

 

동양도자 세계 제일급의 질과 양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大阪市立東洋陶磁美術館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타카安宅컬렉션’의 중국도자, 한국도자를 스미토모그룹 21사로부터 기증 받은 것을 기념으로 1982년 11월에 개관하였다. 소장품은 ‘아타카컬렉션’의 중국도자, 한국도자 약 1,000점 등 현재 약 4,000점에 이르고 있다. 그 중에는 2점의 일본 국보와 13점의 일본 중요문화재가 포함되어 있으며 동양도자컬렉션으로서는 세계 제일급의 질과 양을 자랑하고 있다. 1999년 3월에 새롭게 일본도자컬렉션 및 ‘이병창李秉昌 한국도자컬렉션’ 등을 전시하는 신관이 증축하였다. 또한 일본 근대도예가로서 유명한 하마다 쇼지濱田庄司 작품, 페르시아 도자, 비엔코鼻煙壺: 가루담배를 넣어 두는 용기 등 많은 기증 작품으로 인해 소장품의 범위도 다양해지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그리 많지 않은 도자전문미술관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이하 동양도자미술관)은 도자기를 단지 지식에 의해서만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감성적으로 감상하도록 하기 위해서 시설과 전시방법 등에 여러 가지 궁리를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전시케이스 안에 자연채광을 도입한 자연채광전시는 도자기의 미묘한 색상을 가장 이상적인 자연광 아래에서 감상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시도였다. 또한 편안히 감상할 수 있도록 한 목제 난간, 그리고 전시케이스 안쪽의 벽면에 빛의 양을 줄여 작품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한 차광판遮光板 등 여기저기에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만의 독자적인 고안이 반영되어 있다. 게다가 귀중한 작품을 지진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기능성과 디자인성을 겸비한 오리지널 사양의 지진방지용 전시대를 도입하고 있다.
전시활동으로서는 상설전과 기획전, 그리고 특별전이 있다. 상설전은 아타카安宅컬렉션의 중국도자·한국도자, 이병창李秉昌컬렉션 한국도자, 일본도자 및 오키 세이치로沖正一郞컬렉션의 비엔코鼻煙壺 등의 대표적인 작품 약 400점으로 중국, 한국, 일본의 동양도자 역사를 계통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 외에 연간 수차례의 기획전, 특별전에서는 전문적인 테마를 중심으로 보다 깊은 연구 성과의 반영과 여러 종류의 도자 작품의 매력을 발신하고 있다.
또한 동양도자미술관은 동양도자연구의 하나의 거점으로서 소장품에 관한 조사연구에도 힘을 쏟고 있다. 그 중에서도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국도자, 한국도자에 대해서는 현지연구기관과 연구자와의 학술교류 및 조사연구를 적극적으로 행하고 있다. 조사연구의 성과는 전시 및 도록 등의 출판물, 강연회와 강좌 등의 보급 활동으로 폭넓게 발신하고 있다.
충실한 소장품, 독자적 전시 방법, 동양도자연구의 거점으로서의 조사연구 활동, 매력 있는 전시회 개최 등, 동양도자미술관은 그 전문성을 충분히 살린 여러가지 활동에 의해서 오사카시가 자랑하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자전문 미술관’을 지향하고 있다.

 

아사카와 타쿠미淺川巧 탄생 120년 기념 특별전 
올해는 아사카와 타쿠미淺川巧 탄생 120년이고, 또한 작년에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伯敎의 사위인 스즈키 마사오鈴木正男씨로부터 노리타카가 남긴 많은 새로운 자료가 동양도자미술관에 기증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이번 특별전은 아사카와 노리타카·타쿠미 형제의 사적事跡을 체계적으로 처음 소개하면서 근대에 있어서 한국도자 연구의 초창기를 재조명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 특별전은 2011년 4월9일(토)부터 7월24일(일)까지 동양도자미술관에서 개최된다. 본고에서는 특별전의 중심을 이루는 3개의 부문을 소개한 후, 일본인의 조선도자 수용사의 시점에서 아사카와 형제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와 관련이 있는 조선도자의 명품을 소개한다.


아사카와 노리타카·타쿠미의 마음과 눈
근대에 들어와서 일본인이 한반도에 이주하게 된 것은 1876년에 부산항이 개항되면서 부터이다. 그 뒤로 「조선이민론」이 열렬히 주창되고 장려되었다. 1910년 결국에는 한일합방에 이르게 되면서 더욱 일본인 이주자가 격증했다. 이 시기는 또한 1900년에 처음으로 동경제국대학 인류학교실에서 한반도에 조사원이 파견되는 등 한반도의 고고학적, 미술사적 연구가 본격화하는 시대이기도하다. 그렇게 하여 1913년에 먼저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伯敎, 1884~1964, 다음 해에는 동생인 타쿠미巧, 1891~1931도 그 뒤를 따라서 조선에 건너왔다. 노리타카는 초등학교 교사, 타쿠미는 조선총독부의 산림과 직원으로 근무하게 된다. 노리타카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조선에 이상異常한 동경과 흥미를 품고서略 해협을 건넜다’고 전해지는데(주1), 이 두 사람도 역시 당시의 조선 이민대열 속에서 신천지에 새로운 생활의 장소를 구하려고 한 것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자기들만의 일본인 거주지를 형성하여 조선인과 친하게 사귀지 않았다. 그에 반해 아사카와淺川 형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 조선가옥을 마련하여 조선인들과 친숙하게 살았다. 노리타카도 처음에는 일본과 너무도 다른 풍경과 언어 때문에 당황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친근함’을 느끼기 시작한다1)(주1, 263쪽). 그런 어느 날 골동품 가게의 전등 밑에 희고 큰 항아리가 망연히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 ‘고려의 청자는 과거의 차가운 아름다움이 있지만 이 백자白磁는 현재 나와 피가 통하는 살아 있는 친구이다. 이것은 틀림없다. 나의 눈이 열린 것이다. 좋은 것을 보았다’. 이것이 노리타카와 조선백자의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아사카와 노리타카는 원래 조각가를 꿈꾸고 있었는데 점차 조선도자연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의 주요 연구대상은 그때까지 그다지 가치가 인정되지 않았던 조선시대의 백자였다. 1922년 『시라카바白樺』에 발표한 <이조 도자의 가치 및 변천에 대해서>는 그 출발점으로서 기념비적인 논문이 되었다. 1928년 이러한 노리타카의 도자연구를 경제적으로 지원한 것이 학술 지원 단체였다. 1929년에는 마스다 다카시미츠이물산 사장, 이와사키 고야타미츠이재벌 총수, 노무라 토쿠시치노무라재벌 사장 등 25명의 재계인과 지식인들이 노리타카를 후원하기 위해서 조선도자연구회를 결성한다2). 일본 근대 다인茶人의 고려다완高麗茶碗의 산지에 관한 관심과 노리타카의 가마터 연구가 결합된 것이다. 그 집대성이 『부산요와 타이슈요』1930년 및 「조선고도사료대전람회」1934년이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서 노리타카는 조선시대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야나기 무네요시와 함께 처음으로 일본에 알렸고, 그 후의 민예民藝운동과 일본의 이른바 감상도자鑑賞陶器)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더욱이 특필할 만한 것은 노리타카가 조선도자 연구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조선 사람들의 요업窯業을 예전처럼 번창하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여3), 제법 이른 시기부터 요업종사자의 생계에 주의를 하여 지방요地方窯의 부흥에 강한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지금까지의 연구자들과는 다른 노리타카의 독자성이 있는데, 이러한 그의 노력은 지방요에서의 실제 작품, 그리고 요장窯場과 제작공정을 그린 스케치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수집된 자료에는 지방요의 상황, 한반도 전체에 걸친 가마터의 정보 등 현재로서는 조사 불가능한 귀중한 자료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한편 아사카와 타쿠미는 야마나시현립농림학교山梨縣立農林學校를 졸업한 임업의 전문가이다. 조선총독부 농상공부산림과의 임업시험소현 국립산림과학원에 근무하고, 본직의 분야에서는 자연 상태를 이용하여 소나무 씨앗의 발아를 촉진하는 방법을 개발하였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발견이었다고 한다. 야나기 무네요시에 의하면 타쿠미는 ‘결국 산림을 자연법으로 돌려 보내는 것보다 더 나은 길은 없다’고 했다. 1923년에 조선총독부가 부업품공진회를 개최했는데 타쿠미는 같은 관점으로 이같은 공진회를 가차없이 비판하고, 조선의 공예품에 대해서 「재래의 수법」을 폐하고 「일본식의 수법」을 채용하는 것은 ‘개량이 아니고 파괴이다’, ‘공진회의 전부가 조선의 파괴인 느낌까지 든다’고 말했다.4) 「자연」과 「전통」에 대한 믿음이 타쿠미의 공예연구 안에서 일관되고 있다.
아사카와 타쿠미가 저서로서 최초로 발표한 것은 『조선의 소반』『朝鮮の膳』, 1929년이다. 일상 생활품을 미술공예품으로 독자적인 관점에서 채택한 조선 소반의 역사와 산지별의 특징을 소개했는데, 한국의 소반에 대해서 현재에도 이 책을 뛰어넘는 연구는 없는 것 같다. 계속해서 1931년에는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名考』가 간행되었다. 이 책은 조선시대의 각종 도자기에 대해서 그 본래의 명칭과 용도를 해설한 것이다. 이 두 저서에 타쿠미는 ‘타인의 흉내를 내는 것 보다는 가지고 있는 소중한 것을 잃지 않는 것’, ‘민중이 깨어나 스스로 만들어 내어 스스로 양성해 가는 것’을 호소하여 전통문화 계승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있다.
노리타카와 타쿠미, 그리고 야나기 무네요시가 활동하고 있던 시절의 조선은 일본에 의한 식민지지배를 동화에 의해 은폐하려고 하던 문화정치시대였다. 하지만 조선총독부의 방침이 명확한 「일본화」였던 것에 대해 아사카와 형제와 야나기는 조선 재래의 것을 소중히 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1931년, 『朝鮮陶磁名考』의 출판을 기다리지 못하고 폐렴에 의해 타쿠미는 돌연 그 40년의 생애를 마감했다. 그의 장례식 날에는 상여를 메려는 조선인 친구가 너무나 많아 촌장이 사람을 고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한다. 야나기에 의하면 타쿠미는 조선의 지방 공예의 부흥을 기도企圖했었는데 그의 유지遺志는 형·노리타카에 의해 이어져간다. 타쿠미의 무덤은 지금도 한국인에 의해 서울시 망우리에 소중하게 보존되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본고는 전시회 도록의 문장을 약간 가필수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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