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조 미술평론가
김기찬의 달항아리는 전라도의 멋과 서정을 한껏 품은 역작이라 할 만하다. 그는 그동안 여러 기물들을 작업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 달항아리 작업에 대한 기대와 관심을 버리지 못했다. 그것이 이번 작품 발표 <수월관음을 기다리며 - 김기찬 달항아리 전> 2011. 4.1~4.20 갤러리 ‘re’의 밑불이 되었다는 것이다. 틈나는 대로 꾸준하게 연구해온 달항아리는 항상 마음에 두었으나 생각대로 손이 가질 않았다고 술회한다. 본격적으로 달항아리 작업에 나선 것은 보성지역의 예술가들에 대한 군청 등 당국의 지원에 힘입은 측면이 있다. 그리고 폐교를 활용한 도예전용 전시장 갤러리 ‘re’의 연차적인 기획으로 개인전을 마련할 수 있게 된 것도 한 몫 한 것 같다.
예술가로서 김기찬에게 달항아리 작업은 ‘어머니의 품 속 찾기’로 말할 수 있겠다. 가장 편안하고 포근한 사랑이 넘치는 모태의 품안 온기를 다시 느끼는 순수함의 정수라고 그는 설명한다. 고향의 따뜻한 정을 느끼는, 나아가 전라도의 투박하고 소박한 서정과 그리움을 듬뿍 담아내는 수양인 셈이다. 그는 이번 달항아리 작업에 대해 “어머니의 품 속 같은 느낌을 살려보려 한다”면서 “순수한 전라도의 인정과 자연을 통해 정겨운 고향의 추억과 이야기를 담아내는데 전념하고 있다”고 밝힌다.
흔히 달항아리는 조선시대의 명품들이 그러하듯 오늘날에도 백자로 굽는다. 전남 보성군 문덕면 죽산리 대원사 초입의 백민미술관 맞은편에 자리한 김기찬의 ‘청광晴光 도예원’에서도 달덩이처럼 밝고 환한 달항아리가 주로 나온다. 보성토는 철분이 많아 이 흙으로 자기를 빚으면 색깔이 어둡게 나온다. 이것은 도자기의 표면색이 흙의 철분 함량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이 때문에 김기찬의 작업도 일부 백토를 섞는다. 흙과 불이 창작과정의 전부라 할 만큼 결정적 요소인 점을 감안, 김기찬은 철분이 많은 보성토에 백토와 청자토, 분청토 등을 적절히 혼합하여 색깔을 끄집어 낸다.
그의 달항아리 작업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특징은 ‘덤벙방식’이다. 덤벙은 작품의 외양을 결정하는 유약작업의 한 방식. 특히 김기찬이 공방을 열고 작업해 온 전남 보성지역에서 오래전부터 계승돼 보성의 지역적 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방식이다. 덤벙은 건조되지 않은 작품을 화장토에 덤벙 담군 다음 꺼내는 과정이다. 도자기의 발굽까지 몸뚱이 전체에 유약이 한꺼번에 발라지게 된다. 앞서 언급한 대로 달항아리는 일반 도예품보다 크기가 큰 편이다. 어른이 두 팔로 감싸안아야 할 정도로 볼륨이 있고 높이도 만만치 않아 작업 과정 자체가 상당한 기술을 요구한다. 점토를 다지고 물레를 돌려 빚은 초기 달항아리는 그 흙 자체의 무게와 물을 많이 먹기 때문에 한 번에 덤벙작업을 진행하는데 한계가 있다. 그래서 김기찬은 덤벙방식의 효과를 그대로 살리고 작업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개발했다. 그것이 ‘스프레이 방식’이다. 일종의 진화된, 현대화된 덤벙기법으로 보인다. 나무를 태운 재를 물에 풀어 만든 유약을 압축식 스프레이로 달항아리 표면에 고루 뿌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덤벙기법처럼 유약이 잘 발라지고 백자보다 투박한 질감이 느껴지는 달항아리가 탄생한다.
김기찬의 달항아리 제작 공정은 옛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적당한 크기의 흙을 다져 두 개의 반원형 기형을 만든다. 건조 과정을 거쳐 이것들을 위 아래로 덮어 합친 다음 하나로 붙이는 것이다. 이어 초벌구이를 하여 스프레이로 유약을 발라 가마에 굽는다. 자체 가마에서 24시간 정도 구우면 비로소 달항아리가 태어난다.
김기찬의 작품 중에 밝고 환한 달항아리 외에 주목되는 작품은 보성토로 빚은 것들이다. 거무스레한 표면의 빛깔과 흙의 질감이 그대로 살아있다. 작가의 손길, 물레질 흔적이 도드라진 개성 있는 작품이다.
김기찬이 태어나 성장한 곳은 전남 영암군 금정면이다. 나주와 장흥을 끼고 월출산을 바라보는 지리적, 자연적 환경은 일찌감치 그를 예술가의 감성을 갖게 했다. 유년시절부터 친구들과 어울려 영암과 나주 등지의 야산을 돌며 수집한 괴목 다듬기에 소질을 보였다고 한다. 나무의 뿌리나 고목의 형태를 살려 예술적 이미지를 다듬어 가면서 조형감과 미의식에 눈을뜬 것이다.
그가 예술가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은 대학에서 만난 스승의 가르침이 영향을 주었다. 대학 응용미술과에 입학한 그를 눈여겨 본 최정부 교수(서양화가)가 평면작업보다는 입체(도예)작업에 탁월한 소질을 가진 김기찬을 알아 본 것이다. 최 교수는 그 길로 김기찬을 당시 조선대에 재직 중이던 유명 도예가 서길용 교수에게 보냈다. 김기찬은 서 교수에게 도예의 본질과 선의 미감, 표면처리의 기법 등을 사사했다. 그는 “서 교수님은 도자기의 선을 중요시 하였습니다. 화장토에 섞어 작업하는 곡물상감기법에 정통하였던 서 교수님은 구워서 탄 곡물의 흔적 공간을 활용하여 문양을 만들어 갔습니다. 다시 말하면 외형상의 선의 흐름과 표면의 질감을 자연스럽게 내는 것이 도자예술의 아름다움으로 여긴 것입니다.”라고 설명한다. 김기찬도 표면을 돌로 두드려 돌의 느낌을 자연스럽게 되살려내는 작업을 줄곧 선보였다. 이것도 스승의 영향이다. 자연의 미감을 그대로 접목하는 작업을 추구하며 그는 중견 도예가의 길을 걸어왔다.
일부 내용이 생략됩니다. 월간도예 2011.06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