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2011.05월호 | 전시토픽 ]

경기근대도자 ‘100년의 기록’
  • 편집부
  • 등록 2011-07-12 15:37:11
  • 수정 2011-07-13 08:48:16
기사수정

2011.5.4~7.3 경기도자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

이은실 경기도자박물관 학예연구사

 

19세기 후반 광주 사옹원 분원이 민영화되고 조선백자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겪은 일제강점기는 자의든 타의든 우리의 도자문화를 변질시켰다. 해방이후 안정을 찾을 무렵 한국동란이 발발하였고 우리는 한민족의 분단이라는 아픔을 겪었다. 미국의 원조 등으로 차츰 안정을 되찾은 우리나라는 고유의 문화와 전통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높아졌고, 이것은 전통도자 부흥을 위한 노력으로 이어졌다. 일부 지식인층과 일제강점기 도자기를 제작했던 장인들 그리고 이들에게 수학한 도제적 장인들의 확산은 전통도자 재발현에 있어 큰 역할을 하였고 이러한 전통도자기의 재발현은 근대도자의 역사를 다시 채워나갔다.
기획전 <경기근대도자 100년의 기록>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후반 경기지역의 근대도자를 조망하는 기획전으로 이를 뒷받침해주는 사료와 원로도예가들의 증언을 토대로 기획되었다.
이번 기획전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근대기 장인들의 이동과 정착이었으며 이들의 움직임과 변화에 따른 특징은 크게 3기로 구분할 수 있었다.
제 1기는 분원의 민영화 이후부터 일제강점기로 분원장인의 이동과 정착 그리고 일본인 도자공장에서의 수련한 장인들이 특징이며 제 2기는 해방 전후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로 이 시기는 지역별 도자제작환경 등 입지조건을 중심으로 전통도자 부흥을 위한 노력과 소속장인들의 지역 정착 그리고 산업자기의 확대 등이 특징이었다. 끝으로 제 3기는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로 판로와 제작환경이 유리한 지역으로 장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하고 독립요장이 증가하면서 도예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 특징이었다.
이처럼 근대기 100년의 도자문화는 장인들의 이동과 정착을 통해 그 시기를 구분할 수 있었고, 이들은 과거의 도자역사가 말해왔던 것처럼 도자제작을 위한 유리한 환경, 즉 도자원료, 제작시설(가마 등), 판로 등을 찾아 이동하고 정착하였던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 경기근대도자의 각 시기별 세부특징으로 살펴보고 특히 오늘날 도자문화의 중심에 선 경기 광주·여주·이천을 중심으로 그 100년의 기록을 끄집어내 경기 근대도자를 살펴보고자 한다.


분원의 민영화 ~ 일제강점기
조선후기 분원의 민영화이후 분원은 공소체제(공인12명)로 수년간 운영되었고 그 즈음 일부 장인들은 분원지역에 수명이 출자하여 공장을 설립하거나 자신의 연고지나 지방요로 이주하였다.1) 경기 여주지역은 1896년 광주 분원리에서 사기업을 운영하던 이희풍이 등요 1기를 축조하고 사기제조를 시작하나 곧 실패하였고 얼마 후 1901년과 1908년에 각각 등요가 1기씩 축조되었다. 이렇듯 일제강점기 여주지역은 백자토(싸리산 점토) 등 원료가 산출되는 이점 등이 고려되어 도자기촌으로 그 입지를 다지기 시작하였다.2) 이외에도 여주는 1932년 여주도자기공동작업장이 설립되었고 4년 뒤에는 일본인과 한국인이 합작한 조선도기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한편 한일합병과 함께 한성은 경성부로 개칭되었고 일본인의 거주는 늘어나고 민간소용의 일본도자기의 팽배뿐만 아니라 일본인 도자기공장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는 일제강점기 주목되는 인물로 1908년 진남포에 삼화고려소富田合資會社陶器部를 설립하고 1911년에는 경성에 한양고려소를 설립한 인물이다.3) 이 공장에서는 일인취향의 청자 등을 제작하였는데 근대기 청자장인의 대표적인 인물인 유근형, 황인춘 등이 한양고려소에서 도자기와 인연을 맺었다.4) 이후 유근형과 황인춘은 한양고려소를 그만두고 도자제작에 유리한 지역과 공장을 옮겨 다니거나 요장을 운영하며 청자제작에 매진하였다.
한편 백자장인 김완배는 양구와 여주 등 백자제작과 관련된 지역을 다니며 제도하였고, 공업전문학교 제1기 졸업생인 최면재와 김춘배는 각각 회령과 여주지역에서 도자기를 제작하였다. 이 밖의 경기지역에서는 연천, 포천, 안성, 시흥, 강화 등지에서 도자기가 제작되었고, 가평, 이천, 용인, 김포 등지에서는 도기와 초벌기 등이 제작되고 있었다.5)
이렇듯 분원의 민영화이후부터 일제강점기 동안 자의든 타의든 도자문화에 있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도자문화에 있어 주시되는 움직임은 일부 장인들의 전통도자 제작을 위한 움직임이었다. 이들의 움직임은 수요자인 일본인의 취향 등이 다분히 반영된 것이었지만 어찌되었든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제작에 대한 열의 정성이 있었기에 전국 각지를 다니며 연구했던 것이다. 이들은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제작이 유리한 환경 즉, 가마, 원료, 땔감, 판로 등이 있는 지역을 찾아다니며 전통도자 재발현을 위한 기초를 다져나간 것이다.

 

해방 전후~ ‘60년대 초반
우리나라는 해방 전후로 일본이 중일전쟁과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전국의 일본도자기공장들은 점차 퇴조하기 시작하였고, 한국인들에 의해 밀양제도소(1932), 행남사(1942), 충북제도사(1943) 등 산업자기회사가 설립되어 일상 생활용기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경기 이천지역은 칠기가 생산되고 있었다.6) 당시 이천 신둔면 남정리와 수광리 부근에는 칠기가마 4기가 있었고, 이 중 나중에 지어진 가마가 수광리 칠기가마(현재 광주요)로 1949년경에 축조되었다. 이 지역은 도자기제작이 가능한 물레대장 수명과 도자기를 구울 수 있는 가마 등 전통도자 제작을 위한 여러 입지조건이 충족되어 있었다. 특히 칠기는 옹기와 비슷한 형식을 갖추고 있으나 자기 물레성형과 같은 방법으로 성형되고 번조온도 또한 1200도 이상의 고온으로 제작되는 도자기의 종류로 자기제작과 비슷한 형식이었다. 이러한 점들이 전통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유리한 여건으로 작용되었던 것으로 짐작되어진다.
여주지역은 한양요업사(북내면 오학리), 동일제도사(북내면 현암리), 고려자기공장(북내면 현암리), 삼성요업사 (북내면 현암리) 등이 설립되어 식기, 애자, 위생도기 등을 제작하였고 이 공장들의 원료는 모두 여주지역의 점토를 사용하였다. 성형은 대량생산이 가능한 석고틀 성형이었고 북내면 오학리와 현암리 등지에 밀집되어 있었다.7)
한편 경기 광주지역은 분원이 있었던 남종면의 현·전직 면장들에 의해 분원을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뚜렷한 성과나 이후 자료가 없어 재차 운영된 것을 확인 할 수가 없었다.8) 이 밖의 기타 경기지역은 인천등지에서 식기, 위생도기 등이 제작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해방 전후의 사료가 매우 부족하여 조사와 취재가 가능했던 경기 이천, 여주, 광주지역의 특징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1950년대 후반이 되면서 우리나라는 점차 안정을 되찾았고 한국 공예발전을 위한 노력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이와 더불어 수출을 위한 관광민예품의 제작이 시작되었고 이동이 잦았던 장인들의 정착과 전통도자기 제작 그리고 산업자기 공장의 확대 등 전반적으로 도자제작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아직까지는 제작환경과 여건이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도자기의 발전을 위한 움직임은 지속적으로 있었고 일반의 관심도 조금씩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주목되는 움직임은 도자기의 전통을 현대에 계승하고자 설립된 한국조형문화연구소(성북동가마, 1955~1962년)와 한국미술품연구소(대방동가마, 1956~1958년)의 활동이다. 두 연구소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 기반을 마련하였고 제작은 20세기 전반 꾸준히 제작활동을 해왔던 장인들이 담당하였다. 아쉽게도 두 연구소는 조금은 이른 시기에 문을 열어 국내 수요자를 찾지 못하는 등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폐쇄되고 말았지만 이곳의 소속장인들이 이천지역의 칠기가마로 이주하여 자기를 제작한 것은 경기 근대도자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9)

이 시기 이천지역은 이현승, 홍재표, 이정하, 고승술 등이 칠기를 제작하고 있었고, 자기를 제작하던 장인들이 정착하면서 점차 칠기에서 자기제작으로 변모되어 갔다. 칠기장인 홍재표는 운영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칠기가마와 일대 부지(현재 광주요 위치)를 1959년 조소수(광주요 설립자)에게 매도하였다. 홍재표는 곧바로 조소수씨의 공장장을 겸하면서 신둔면사무소 뒤편에 수금도요(1959년)를 설립하고 함께 운영하였다. 지순택은 이천에 내려왔다가 젊은 도공 윤덕중, 박수만, 김재호, 박부원 등과 강원도 홍천과 횡성 등지에서 자기를 제작하였고 1960년대 초중반 이천으로 재차 올라와 광주요 칠기가마에서 제작을 하다가 현재 고려도요가 위치하고 있는 곳에 가마를 열었다. 유근형은 1958년 이천에 내려와 인천등지를 오가며 청자를 제작하였고 유광열은 부친의 권유로 1960년 이천에 정착하였다.
당시 이천에서 제작된 도자기는 백화점등지에 납품하거나 일본으로 판매되는 것인데, 일본으로 판매가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무역회사(한국과 일본)를 운영하던 조소수씨의 역할이 매우 컸으며, 이로 인하여 이천지역의 도자기가 번성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0)
여주지역은 북내면 오학리를 중심으로 한양요업사, 동일제도사, 신흥요업사, 삼성요업사, 고려자기공장 등에서 백자식기와 요강, 애자 등을 대량생산방식으로 제작하고 있었고 여주산 점토를 수비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이 일대는 생활자기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면서 전국의 도자상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고 점차 공장규모가 확대되었다.11)
광주지역은 도자기를 제작하던 곳이 전무했던 것으로 보이며, 적벽돌을 생산했다는 자료가 남아있을 뿐이다. 1962년 7월 16일 발행된 경향신문 논설에는 ‘백자산지로 이름났던 광주 분원이 현재 그 자취마저 희미하고 선정비 십수기와 자기파편만 즐비하다(역사학자이며 언론인 천관우)’라고 하며 백자산지의 퇴조에 대해 안타까움을 전하였다.
이 외의 기타 경기지역에서는 당시 경기도에 속했던 인천시가 여주군보다 요업생산실적이 높았으며, 시흥군에서는 타일 등이 생산되고 있었다.12)

 

‘60년대 후반~ ‘70년대 초중반
1960년대 후반 한국사회는 고속 성장한 한국경제로 인하여 민족의 주체성이 고취되고 문화적 잠재력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갔다. 이즈음 도자기에 대한 일반의 관심 또한 높아졌고, 한일국교정상화이후 일본인들의 고려청자 열기도 다시 들끓기 시작하였다.
이천지역은 광주요(조소수), 고려도요(지순택), 해강요(유근형, 유광열), 수광도요(이정하), 청운도요(이준희), 도방요(신상호) 등을 중심으로 전통도자제작이 활발하였다. 이 요장들의 활약은 한국과 일본 등의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면서 그 수요는 더욱 늘어났고, 기술이 있는 타 지역의 장인 또는 젊은이들이 도자기 제작을 위해 이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13)
여주지역은 산업자기가 지속적으로 활성화 되어 그 규모가 더욱 확대되어 갔고, 독립요장의 증가는 물론 산업자기에서 전통도자기로 전환하는 작가들도 생겨났다. 전통도자제작이 유행처럼 번져나갔던 것이다.
광주지역은 6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전혀 요장이 없었다. 그러나 후반에 들면서 광주 분원에 대한 역사적 중요성을 인식한 도예가 들이 이주하여 가마를 열기 시작하였다. 번천요(안동오), 분원요(최근식), 산곡요(한창문)등이 설립되면서 전통도자기 제작이 시작되었고 조선백자의 산실인 경기 광주의 도자역사가 다시 쓰여 졌고 일반인들에게 재인식되었던 것이다. 70년대 중반이 되어서는 타 지역 장인들이 이주하면서 점차 요장이 증가하였다.
한편 이 시기 도예전공 대학생들이 작품을 제작하기에 여건이 좋은 이천과 여주지역으로 내려와 작업을 하곤 하였다. 60년대 초반부터 조금씩 내려오기 시작하여 60년대 중후반 무렵에는 더욱 많은 학생들이 작품제작과 소성을 위해 이 지역으로 내려왔다. 당시 학생들은 디자인 도안과 유약 등을 준비해 왔고 이 지역의 대장들이 제작을 맡고 함께 소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학교 내에 제작시설이 완비되고 현대식 가스가마가 보급되면서 점차 학생들의 발길도 줄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위에 언급된 요장의 소속장인 또는 도자기와 관계가 있던 인물들이 요장을 독립하면서 요장 수는 더욱 증가하였다. 이 외에도 가스가마가 보급되면서 젊은 도공들의 요장독립, 양적 확산은 더욱더 가속화되었다.

 

일부 내용이 생략됩니다. 월간도예 2011.05월호를 참조바랍니다.

0
비담은 도재상_사이드배너
설봉초벌_사이드배너
산청도예초벌전시장_사이드배너
월간세라믹스
전시더보기
작가더보기
대호단양CC
대호알프스톤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