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깨진 청자를 품다
가마터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허허벌판이다. 이렇다 할 표시도 없는 곳이 대부분이다. 그러다보니 지나치기 일쑤다. 지나갔던 곳을 되돌아온 적도 많았다. 빙글빙글 아무리 돌아도 눈에 띄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고 보면 이정표가 없기는 삶도 마찬가지이다.
폐허가 된 가마터를 뒤지면서 흥분과 셀렘을 느꼈다. 정신적으로 고양되는 기분도 들었다. 언제부턴가 답사를 마치고 오면서 순례자를 떠올렸다. 이제 몇 달이고 발이 부르트도록 걸으면서도 행복감에 도취되어 감격하는 그들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내게 청자기행은 순례였다.
-‘들어가며’ 중에서
전국 각지의 가마터에서 찾아낸 수많은 청자 편린들의 흔적들에서 천년 전 도자기의 비밀을 발견해 내는 책 『나, 깨진 청자를 품다』 효형출판 | 360쪽 | A5 | 17,000원)가 지난 2월 출간되었다. 저자는 전라, 충청, 경기, 황해 등 전국의 22개 가마터에서 얻은 사금파리를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기존 청자자료에 보다 구체적인 사실들을 제시한다. 천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청자의 고향을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저자는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느낀 감성적 사고를 함께 서술한다. 이 책은 청자의 비밀을 알아가는 설레임과 동시에 자아의 참된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 동참하고 싶은 충동을 선물받는 책이다.
저자 이기영李基榮은 서강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 프랑스 그르노블 2대학에서 발전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유럽 경제 연구, 현대경제연구원 기획조정실장 등 민간 영역에서도 활동했다. 경기개발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겨 세계도자기엑스포 관련 연구와 자문을 수행하면서 도자기와의 운명이 시작되었다. 명지대 산업대학원 도자기기술학과에서 도자 석사과정을 마쳤으며 경기도 이천에서 도자기 사업체를 운영했다.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통해 고난과 기쁨, 좌절과 희망을 맛 본 이후 서울 광화문에 이기영그릇제작소를 마련해 민화를 모티브로 한 도자작업 중이다. 전국 각지 옛 가마터를 찾아다니며 우리 도자 문화의 여러 양태를 조사·정리해왔으며 또 다른 저서로는 『민화에 홀리다』(2010)가 있다.
Q1 『나 깨진 청자를 품다』를 출간하게 된 이유
A 우리 문화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전통에 대해 외형적으로는 자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홀대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문화로 청자를 꼽지만 청자에 대해 잘 모르고 있습니다. 또 청자에 대해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신라말 고려초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청자가마에 대한 궁금증으로 조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가마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 제후들의 산업이었습니다. 도자사학자들은 ‘청자 가마의 주인은 지방 호족일 것이다’라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그 당시의 호족이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도자사학자도 큐레이터도 아무도 설명을 해 주지 않더라구요. 이것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느껴 조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Q2 가마터 기행 과정이 궁금합니다
A 전남 영암군 구림리 가마터를 시작으로 진안·고창·영암·해남·장흥·강진·고흥 등 호남 11개 지역, 서산·공주 등 충청도 4개 지역, 양주·고양·인천·시흥·용인 등 경기도 5개 지역을 다녔습니다. 북한 황해도 지역 2곳을 제외한 20개 지역에서 생산된 청자의 흔적을 찾아보았습니다. 천 년 전 도공에게 버림받고, 현대에 이르러 유물 발굴팀의 선택 또한 받지 못한 채 가마터에 버려진 비운의 도편들은 그 가마의 비밀을 간직한 진짜 유물이었습니다. 어떤 이유로 그런 불량품이 생산되었는지 온몸으로 말하는 이 조각들에서, 당시 그 가마의 청자 제조 방식, 도공의 기술 수준, 원료의 질과 종류, 심지어 가마 주인의 지위와 신분, 주변 지역 및 바다 건너 중국과의 연관성까지 매우 다양하고 중요한 정보를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버려진 도편들은 고려청자의 비밀을 간직한 채 실종된 블랙박스였고 저는 천 년 만에 그것을 회수한 수색대였던 셈입니다.
Q3 작년 출간된 『민화에 홀리다』에 관해 소개 부탁드립니다
A 도자기에 넣을 가장 한국적인 문양과 도안을 궁리하던 중 전통 민화의 매력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림 한 폭 한 폭에 담긴 생명력과 이야기가 저를 민화 연구로 이끌었습니다. 민화가 그려지기 시작한 200년 전 조선의 정치경제학적 배경에서부터 당시 민화의 소비자와 공급자의 생활에 이르기까지, 민화에 대한 깊이있는 역사학적 접근을 시도한 책입니다. 또한 21세기에 화려하게 부활한 민화의 현대적 가치와 함께 민화작가 서공임의 창작 민화 80여 점을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홀대를 받으며 예술적 지위를 누려본 적 없는 민화에서 우리 민족의 원형을 찾아보고자 했습니다.
Q4 ‘청자’에 관해
A 청자란 우리 역사의 블랙박스라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의 분신입니다. 우리를 대표하는 문화코드에 대해서 조금 더 긍지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알려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문화의 세계화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장윤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