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현대미술의 중요한 키워드인 숭고the sublime, 몸body, 미니멀리즘minimalism, 물성materiality, 서사narrative, 개념미술conceptual art, 팝아트pop art를 중심으로 본 현대도예 비평의 글이다. 하지만 형식면에서는 기행문적 수필의 형식을 빌어 독자들이 현대 도예 담론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졌다. 한국의 현대도예가 오랜 동면의 시기를 지나 이제 찬란했던 옛 영화를 위한 용트림을 하는 이 시기에 한국 현대도예의 미래 비젼과 현재의 성찰을 제시하는 글이 될 것이다.
도예 디자인에 대해서 너무 많이 한 말과 거의 하지 않은 말
열세 번째 작가 : 아유미 호리에Ayumi Horie
“디자인이란, 사물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물음이다.” -김민수, 김민수의 문화 디자인
아유미 호리에Ayumi Horie를 처음 만난 것은 내가 뉴욕에 있는 어느 시골 대학에 다니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한눈에 보기에도 동양인으로서의 평범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도예 디자이너들 중 한명이라고 소개를 했다. 당시 ‘절묘히 기능적이고, 다분히 철학적인’이란 모토motto로 컵 디자인에 대해 골몰하고 있었던 나는 그녀의 작품을 보고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작품에 그려진 동물들의 형태와 모양은 어린아이들의 드로잉을 연상시킬 만큼 기술적인 면모를 갖추지 못했었고, 컵 위에 화장토를 잘못 발라 생긴 손자국과 유약을 시유하다 잘못 흘러내린 자국이 그 당시 내 눈에는 좋은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게 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나는 ‘컵’ 디자인에 대한 유난한 애착과 열정을 가지고 작업에 몰두했지만, 내가 마음에 드는 컵을 성공적으로 만들지도 못했고, 롤 모델role model이 될 만한 작가도 만나지 못했던 것 같다. 컵의 단순한 ‘기능’을 아우르면서 철학적 ‘깊이에의 수복’을 지닌 도저한 컵을 만든다는 것이 왜 그리도 어려운 일이었을까?
나는 지금 집 안에 존재하는 물건들을 하나씩 들여다본다. 의자, 소파, 테이블, 그리고 컵. 나의 시선은 한동안 컵에 고정되어 있다. 이 컵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집안에 존재하는 것일까? 목이 마를 때마다 허겁지겁 컵을 주워들고 정수기로 달려들기 위해서는 컵의 적당한 무게와 컵의 몸뚱이에 튼튼하게 달라붙은 손잡이의 안정적인 위치는 생존의 편의성을 위한 필수적인 요건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기능’이라고 부른다. 이 컵의 본래의 기능에 부합하기 힘든 구조를 지닌 컵은 ‘오브제’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태어난다. 음료를 담을 수 없는 이 오브제는 아이들의 손이 닿지 않은 어느 외진 곳에 먼지를 소복이 담은 채 그렇게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기능’은 인간의 생활양식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어서 사물과 인간의 촉각적인 ‘친밀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인간의 몸과 친밀해진 사물은 확장된 신체의 일부분이 되어 뇌의 명령과 인식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존재한다. 그곳은 인간의 몸에 최적화된 기능을 지닌 사물이 인간의 몸과 합일合一되어 상존하는 사물의 또 다른 ‘뒷면’이다. 불편한 기능을 지닌 오브제는 우리 몸의 친밀성보다는 시각적인 혹은 지적인 호기심을 유발한다. 하지만 자신이 놓여진 장소에서 오랫동안 인간의 시선에 노출되면 인간의 지각을 무디게 만들고, 급기야 주위의 배경과 오브제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그래서 시야에 오래 노출된 오브제는 자신의 미학적 생명력을 잃고 화석화되어 자신이 몸담고 있는 배경으로 흡수된다. 다시 말하면 기능을 지닌 물건이 인간의 몸의 일부로 흡수되는 것과는 달리 비기능적인 오브제는 그것을 품고 있는 배경으로 흡수되는 것이다. 이것은 작품이 더 이상 ‘아우라’를 생산하지 못하는 단계이고, 자신의 예술적 수명이 다하는 시점인 것이다. 하지만, 진정 예술적인 작품은 사물로 소멸되지 않기 위해 처절한 현상학적인 몸부림을 친다. 자신의 ‘아우라’를 잃어버리지 않는 작품들은 인간의 과학적인 시지각 현상을 초월하는 또 다른 세계에 존재한다. 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디자이너 혹은 예술가의 책무인 것이다.
나는 지금 미국 뉴욕 주에 있는 허드슨 계곡Hudson Valley으로 가고 있다. 아유미 호리에Ayumi Horie를 만나기 위해서다. 무엇보다 내 삶이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갈 때, 나의 여정이 정처 없음을 고백할 때 나는 순례자처럼 이곳을 들린다. 그리고 한적한 시골 공방에서 묵묵히 작업을 하는 그녀를 다시 본다. 대가라고는 여전히 믿겨지지 않은 동안의 얼굴, 나지막한 저음의 평화로운 목소리, 국적을 알기 힘들 만큼 완벽한 영어구사력,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아유미를 묘사할 수 있는 전부이다.
아유미는 여전히 자신의 작품에 다양한 동물들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의 작품을 보면 허드슨 계곡에 드나드는 여우와 너구리의 교태로운 몸짓을 이제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는 10여 년 전에 구입한 백여 년 된 시골 교회를 작업장 겸 주식을 해결하는 소박하고 아늑한 집으로 개조했다. 그곳에서 아유미는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와 근거리에서 서식하는 온갖 동물들과 교감한다.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그 교감의 일부분이며 또한 교감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위적이고 기계화된 문명의 눈으로 그녀의 작품을 보면 그 진면목을 알 수가 없다. 아유미가 작품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은 흙의 원초성과 대자연의 리듬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다. 흙의 물성과 인간의 손이 만나는 그 원시적 공간과 시간을 통해서 아유미는 우리에게 잃어버린 시간과 기억에 대한 지층의 신성한 내부를 드러낸다.
아유미의 작품에서는 ‘실수’라는 인위적인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레위에서 만들어지는 컵이 어떤 기계적인 방향성을 지니지 않기 때문에 흙이 지니는 원초적인 물성과 인간의 직관과 즉흥성을 작품에 그대로 반영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물레를 차다가 예기치 못하게 만들어지는 일그러진 형태나, 유약을 바르면서 우연히 흘려진 ‘사고’를 흙으로 작품을 만드는 자연스러운 하나의 과정으로 정의한다. 심리학자 엘렌 랭거Ellen J. Langer는 “우리의 경험이 과거에 학습한 경험 범주에 기계적으로 경직되게 의존하면, 습득한 하나의 관점만으로만 바라보게 되어 창의적 사고가 제한을 받는다”1)고 했다. 예술을 교육하는 우리의 풍토가 오버랩 된다. 아직까지 감각과 공식에 얽매여 실수를 인정하지 않은 우리 아카데미의 풍토가 아쉽다. 표준화된 집단의 체제 속에서 순응만을 강요하는 우리 땅의 미의식은 너무나 천편일률적이서 그 어떤 개별자의 주체성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무엇보다 좋은 작품과 그렇지 못한 작품에 대한 지나치게 획일화된 평가들은 언제나 새로움에 목마른 미의식에 숨통을 조인다. “실수는 작품에 유연하고 탄력적으로 접근하도록 할 뿐 아니라 우리의 개성을 드러내 준다”2) 는 엘렌 랭거의 말이 우리에겐 요원遙遠한 명제임을 자인하는 순간 작업장 창문 너머로 순백의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눈보라에 감춰진 이국의 이름 모를 나무와 꽃들의 자태는 그렇게 다가설 수 없는 먼 풍경이었다. 그것은 상처의 다른 이름이었고, 내가 머물렀던 곳의 풍경과 교차되어 생겨난 현상학적인 흔적이었다.
아유미가 흙의 원시적 물성에 대한 인식을 처음 가지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알프레드 대학Alfred University에 다닐 무렵 ‘drying throwing’이라는 기법을 개발하게 되었을 때부터였다. 그 기법은 적당하게 건조된 흙덩어리를 물레 위에 올려놓고 외부와 내부를 조각칼로 동시에 깎아내는 독특한 방식이었다. 물은 전혀 쓰지 않고, 적당하게 굳은 흙의 표면에서 생기는 예기치 못한 질감의 발견은 흙이 신성한 내부를 지니고 있는 원초적인 물질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은 치밀하고 의도된 계획보다는 ’직관‘과 ’즉흥성‘에 의존하고 있었다. 직관과 즉흥성은 흙의 신성한 내부를 밝힐 수 있는 비밀의 단초였던 것이었다. 그 결과물은 전통적인 공예와 디자인의 규범이 강조하는 기계적 ’완벽성‘과는 거리가 먼 흙이라는 재료가 지닌 ‘취약성vulnerability’과 ‘서투름awkwardness’의 집합체인 듯 보였다. 제도권과는 ‘탈코드화’된 이 생경한 문양들 - 손자국, 유약의 지나친 흘러내림, 움푹 들어간 몸둥아리, 금이 간 곳에 다른 흙을 붙여놓은 자국- 은 새로운 디자인을 정의하기 위한 하나의 시발점에 불과했다. 시간이 지나고, 아유미의 전시의 횟수가 거듭될수록 이 탈코드화 된 시각적 언어들은 차츰 ’새롭고 혁신적인‘ 기법으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고, 지금은 미국의 많은 도예대학의 교과과정에서 중요한 기법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예술적인 능력은 ‘탈코드화’를 ‘코드화’로 전이시키는데 있다. 현대 박물관에 전시된 명화들을 그린 작가들은 대부분 자신의 생애에 이것을 이룩하지 못했었다. 예술가는 새로움을 창조하는 사람이지만, 이 새로움은 언제나 ‘낯섦’을 동반한다. 이 ‘낯섦’을 기존의 미의식과 소통을 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시지각이 오랜기간 특정 사회와 문화가 구축해온 지식의 형태와 사회적 권력, 그리고 보편적 욕망의 체계에 이미 길들여져 버렸기 때문이다.3) 사후에 평가를 받는 예술가들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들의 의식 속에 내재되어있는 관습적인 생각의 틀을 바꾸는 일은 이렇듯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동양에 비해 전통성이 상대적으로 미약한 미국의 도자는 많은 실험적인 예술가들을 배양할 수 있는 우세종적인 환경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유미는 최근에 미국의 코미디언이자 동화작가인 사라 베론Sara Varon과 함께 작업을 시작했다. 동화작가에게 좀 더 창의적이고 친밀한 작품을 위한 영감을 얻기 위해서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래서 최근 작품에는 만화책의 한 컷을 연상시킬 만큼 아이들의 정서를 더욱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문득 피카소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라파엘처럼 그림을 그리는 데 4년이 걸렸지만, 어린아이처럼 그리기까지는 평생이 걸렸다”고 했다. 왜 우리는 라파엘처럼 그림을 그려야 잘 그린다는 정답을 미리 가지고 예술을 시작하는 것일까? 그 폐쇄적인 도정道程의 끝은 신기루처럼 펼쳐진 사막과 다름이 없음을 많은 예술가들이 증언하지 않았던가? 백남준, 김흥수와 같은 예술의 거장들도 말년에 아이들의 그림에 탐닉한 것을 보면 우리는 이미 어린 아이였을 때 예술하는 법을 터득했는지 모른다. 디자이너 김민수는 디자인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억지로 강요된 시각이 아니라 자신의 눈을 발견하고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도록 ‘마음의 지도’를 그려주는 일이라고 말했다.4) 아유미의 마음의 지도는 끝없는 동화적 상상력과 원시적인 자연이 만나는 ‘대지의 문법’을 발견하기 위함일 것이다. 현재라는 시간 옆에 둥지를 틀고 있는 과거의 시간의 켜들, 그 깊이를 사유하는 아유미의 작품들은 지난 10여 년 동안 나의 미의식에 가장 많이 영향을 주었다. “디자인이란, 사물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물음이다”라는 한국의 디자이너 김민수의 언설에 아유미는 “시간과 기억의 지층을 탐험해서 사라짐이 없는 영원의 세계를 보여주려고 한다”라고 대답을 한다. 현재의 시간성이 갖는 공허감, 그 허무에 대한 의식의 반작용으로 표출되는 시원始原에 대한 향수와 대지의 문법에 대한 열망은 모든 예술가들이 지향하는 공통된 미의식인 것 같다.
허드슨 계곡을 빠져 나오는 길은 언제나 시렸다. 마음 한켠에 아린 상처가 다시 돋아나는 기분이었다. 풍진風塵 세상에 부침浮沈이 없는 삶이 어디 있을까 만도, 대지의 품을 떠나 정주민의 세상으로 가는 내 몸이 지독한 요나컴플렉스Jonah Complex5)에 시달리고 있음을 느낀다.
일부 내용이 생략됩니다. 월간도예 2011.04월호를 참조바랍니다.